동뢰연상(同牢宴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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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때 신랑과 신부가 몸과 마음을 합체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상.

개설

동(同)은 ‘한가지 동’, 뢰(牢)는 ‘짐승 뢰’이니까 동뢰연이란 짐승으로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다. 유교식 혼례에서 특별히 준비한 새끼돼지로 신랑과 신부의 몸을 합체시키기 위하여 준비한 상이다.

연원 및 변천

동뢰연상이 오르는 혼례는 시집살이혼이라고 부르는 친영혼(親迎婚)이다. 1349년(고려 충정왕 1)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혼례 때 북경에서 친영혼을 한 것이 시집살이혼의 시작이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왕권을 정치·사상적으로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어 왕권 강화에 부합하도록 의례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1419년(세종 1) 세종은 왕가 자녀의 혼인은 친영례(親迎禮)를 따른다고 하는 교시를 내려 왕실이 솔선수범하고자 하였다. 1471년(성종 2)에는 성리학적 혼가례(婚嫁禮)를 포함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였다. 1474년(성종 5) 왕세자·왕자·왕녀·종친·문무관 1품 이하에게 친영을 기본으로 하는 혼례의식을 포함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궁중에서의 친영의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512년(중종 7) 10월의 다음과 같은 교시는 이를 잘 반영한다.

“조선의 풍속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하는 것을 정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고례(古禮)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금부터 왕자와 왕녀의 혼인은 모두 고제(古制)에 따라 행한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하는 것이란,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 온 처가살이혼을 말한다. 신랑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기 전에 신부 집에서 묵고, 신부 집에서 신방을 준비한 3일째에 비로소 동뢰연상을 받는 것이 처가살이혼이다. 1512년(중종 7)까지도 처가살이혼이 계속되고 있어 고제인 친영혼을 따르도록 한 조치이다.

왕의 가례일 경우에는 『국조오례의』에 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책봉(冊封)을 비롯하여 사자(使者)에게 명하여 왕비를 봉영(奉迎)하는 의식, 동뢰연, 왕비가 백관의 하례를 받는 의식, 왕이 백관과 회례하는 의식, 왕비가 내명부와 외명부의 조회를 받는 의식이 있어 고례를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자 하였다. 하지만 1525년(중종 20) 사자에게 명하여 왕비를 봉영하는 의식 대신에 왕이 직접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례를 고제에 준하여 고찰하도록 하여, 중종은 신부 문정왕후를 친영 장소로 정한 태평관(太平館)에서 몸소 맞이하였다. 이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왕이 직접 신부를 맞이하러 갔다. 그렇지만 왕비를 맞이할 때 친영하는 의식은 1702년(숙종 28)에야 『국조속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왕의 혼례는 중종 이후 선보기인 간택(揀擇), 부인으로 택한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랑의 예물을 신부집에서 받아들이는 예인 납채, 혼약의 증거로서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사자를 보내어 폐백을 받게 하는 예인 납징, 신랑 집에서 사자를 신부 집에 보내어 혼례 날짜를 묻게 한 후 신부 집에 정한 날짜를 알리는 예인 고기, 신랑이 몸소 신부를 맞이하는 예인 친영(親迎, 동뢰(同牢), 혼례 후 신부가 시부모님을 배알하는 예인 조현(朝見) 등으로 거의 정착하였다.

백성들에게는 『주자가례』를 근거로 한 친영혼을 하도록 하였다. 1513년(중종 13) 유학자 김치운(金致雲)이 최초로 친영혼을 행하였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처단되고 나서 친영은 폐지되었다.

명종대에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동뢰연을 행하고 다음 날 아침 신랑 집으로 와 시부모에게 조현례를 행하는 반친영혼(半親迎婚)이 사민가(士民家)에서 행해졌다. 반친영혼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형태

왕이나 왕세자의 동뢰연상차림은 연상(宴床), 좌협상(左俠床), 우협상(右俠床), 면협상(面俠床), 대선상(大膳床), 소선상(小膳床), 찬안상(饌安床), 미수(味數), 과반(果盤), 중원반(中圓盤), 주정(酒亭), 향안(香案), 옥동자(玉童子), 향꽂이[香串之], 향좌아(香佐兒), 준화상(樽花床)으로 구성되는데 신랑과 신부에게 각각 차려 주었다. 이들 상에서 동뢰연상 역할을 하는 상이 미수이다.

영조는 가례 때 차리는 화려한 상차림을 사치스럽다고 여겨, 1759년(영조 35) 동뢰연상 이외의 연상·좌협상·우협상·면협상 등은 없애도록 명하였다(『영조실록』 35년 5월 7일).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찬안상을 중심으로 마련된 교배석(交拜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신랑이, 서쪽에는 신부가 선다. 1749년(영조 25)에 나온 『어제국혼정례(御製國婚定例)』에 의하면 초미(初味)는 전복자기[全鰒煮只]·생이(生梨)·산삼병(山蔘餠)·수정과(水正果)·백자(栢子)·약과(藥果)·추복탕(搥鰒湯)·추청(追淸)이고, 이미(二味)는 생치자기[生雉煮只]·전유어(煎油魚)·송고병(松古餠)·수정과·황율(黃栗)·행인과(杏仁果)·세면(細麵)·추청이며, 삼미(三味)는 어만두(魚饅頭)·산약채(山藥菜)·자박병(自朴餠)·수정과·대조(大棗)·전은정과(煎銀正果)·장육자기[獐肉煮只]·추청으로 이들은 신랑과 신부에게 각각 차리는 미수이다.

『의례(儀禮)』「사혼례(士昏禮)」에서는 돼지의 왼쪽은 신랑상에, 돼지의 오른쪽은 신부상에 조(俎)에 담아 올리고, 신랑상과 신부상 각각에 석(腊: 말린토끼찜)·어(魚: 생선)·급(湆: 국)·장(醬)·저(菹: 김치)·해(醢: 젓갈)·서(黍)·직(稷)을 차려 3잔의 술과 함께 술안주로 먹도록 했다.

『의례』 속의 찬품들을 『어제국혼정례』에서 미수로 대체한 것은, 조선왕조가 고려왕조에서 행하던 혼례를 속례(俗禮)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원래의 동뢰연이 추구하고자 했던 돼지고기가 중심이 된 안주상을 차리지 않고, 초미는 술 제1잔의 술안주, 이미는 술 제2잔의 술안주, 삼미는 술 제3잔의 술안주가 되어 술이 신랑과 신부에게 오를 때마다 제공되었다. 민가에서는 초미, 이미, 삼미를 ‘입매상’이라 하였다.

돼지고기가 중심이 되어 차려진 안주상이든, 초미·이미·삼미든 이들은 술 3잔을 위해서 준비한 찬품이다. 동뢰연에서는 술안주만큼 중요한 것이 술이다. 돼지고기가 신랑과 신부의 몸을 합체시키는 데 올라가는 찬품이라면, 술은 신랑과 신부의 정신을 합체시키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제1잔은 좨주(祭酒)로, 제2잔은 먹은 음식을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술로, 제3잔은 신랑 신부의 정신을 합체시키는 술로 동원되었다. 그래서 제3잔의 술잔은 표주박을 둘로 쪼개서 만든 합근(合卺)을 사용하였고, 제3잔의 술은 합근주(合卺酒)라 했다.

조선왕실에서 고려왕실의 혼례를 속례로 받아들여 술안주로 올라가는 찬품에 돼지고기를 올리지 않았듯이,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술 3잔, 합근배 등의 형식은 유교식 혼례를 채택하였지만 음식과 같은 내용은 옛 풍속대로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유교식으로 지켜지지 않는 음식을 변화시키고자 돈반(豚半)·어(魚)·계반(鷄半)·병(餠)·저(菹)·해(醢)·장(醬)·갱(羹)·반(飯)으로 구성된 상차림을 규범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관행대로 행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동뢰연상을 초례상이라 하고, 밤·대추·술주전자·술잔·합근·청색보자기와 홍색보자기에 싸여진 닭 2마리를 차려놓고 이를 동뢰상이라고도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어제국혼정례(御製國婚定例)』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김상보,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수학사, 1995.
  • 김상보, 『조선왕조 혼례연향 음식문화』, 신광출판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