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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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생선, 채소 따위에 물을 많이 붓고 끓인 음식.

개설

국의 한자어이다. 일상식과 의례식에 모두 사용되었다. 일반 제사에서는 반(飯)과 더불어 진설하는 맑은 고깃국을 의미하지만, 왕실 제사에서는 간을 하지 않은 대갱(大羹)과 오미(五味)를 고루 갖춘 화갱(和羹)을 모두 포함한다. 왕실 제사에서는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고대 중국의 예법을 고수하는 대신, 조선에서 생산되는 미나리와 무에 육편을 섞어 갱을 만들어 진설하였다.

내용 및 특징

갱(羹)은 일상식과 의례식에 모두 사용된다. 일상 음식으로 먹는 갱은 국의 다른 표현으로, 밥을 의미하는 반과 더불어 한국 밥상의 기본을 이룬다.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바치는 제사상에도 반과 갱이 올라간다. 다만, 제사상에는 ‘서반경동(西飯羹東)’이라 하여 밥과 국의 위치를 반대로 놓음으로써 신으로 승격한 조상과 인간 존재를 구분 짓는다.

그런데 왕실 제사에 쓰인 갱은 형식이 다소 복잡하다. 왕실 제사상에 올리는 갱은 조리법과 그것을 담는 제기(祭器)에 따라 대갱과 화갱으로 구분한다(『숙종실록』 42년 4월 10일). 대갱은 간을 하지 않은 고깃국으로 고기를 삶아서 국을 만들어 올린다. 등(㽅)이라는 그릇에 담기 때문에 등갱(㽅羹)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반면, 화갱은 오미를 고루 갖춘 고깃국으로 소금과 매실을 이용하여 간을 맞추는데, 여기에 규(葵)·환(荁)·모(芼) 같은 푸성귀를 더하면 맛이 더욱 부드럽다고 한다(『현종개수실록』 2년 5월 12일). 화갱은 형(鉶)이라는 그릇에 담아내기 때문에 형갱(鉶羹)이라고도 불렸다. 대갱과 화갱은 합쳐서 양갱(兩羹)이라 하였고, 소·양·돼지를 사용하여 각각 3그릇씩의 갱을 진설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선비들이 생각했던 가장 최소한의 밥상 차림은 반과 갱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요순(堯舜) 시대를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이 현실 속에서 그 시대를 재현해 보려고 했던 상고적(尙古的) 이상론이 반영된 결과였다.

조선 유학자들이 고대 중국을 그대로 재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 고대 중국의 예법은 책을 통해 전승되었는데, 문자와 간단한 도식만으로는 그 전모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법에 따르면, 화갱은 오미를 고루 갖추고 규·환·모를 넣어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제사를 관장했던 예조(禮曹)조차도 오미는 어떤 물건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고, 환이 무슨 나물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였다(『숙종실록』 43년 6월 21일).

또한 조선은 고대 중국과 풍토가 달랐다. 이러한 점을 인식했던지 『오례의(五禮儀)』의 주(注)에는 “무릇 신명에게 제사하는 물건 중에서 그때에 없는 것은 그때에 있는 물건으로 대신하고, 외방(外方)에서는 토산물이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 채운다.”라고 하여 대용(代用)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화갱의 경우,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미나리와 무에 육편을 섞어서 만들어 올리곤 하였다.

참고문헌

  • 국립민속박물관, 『사직대제』, 민속원, 2007.
  • 주영하, 『음식인문학』, 휴머니스트, 2011.
  • 배영동, 「안동지역 일상음식과 제사음식의 비교」, 『민속연구』9, 1999.
  • 배영동, 「전통적 기제사를 통해 본 조상관」, 『비교민속학』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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