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서원(遯巖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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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인조 12) 충청도 연산현(連山縣)에 건립하여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서원.

개설

김장생을 제향하는 도학(道學) 서원으로 건립한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이후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연이어 제향함으로써 기호 사림의 학맥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17세기 예학(禮學)의 종장인 김장생과 그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계 주요 산림들을 제향한 충청 지역의 대표 서원으로, 고종대의 전국적인 서원 훼철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돈암서원 관련 기사는 6건이다. 효종대 사액 관련 기사와 1688년(숙종 14) 연산유학(幼學)홍우안(洪友顔) 등의 송준길 추배(追配) 상소, 그리고 고종대 전국적인 서원 철폐가 단행될 때 존속한 47개의 서원에 대한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밖에 서원에 대한 기사는 1716년(숙종 42) 노론과 소론 간에 벌어진 『가례원류(家禮源流)』 편찬을 둘러싼 시비 과정에서 돈암서원을 부분적으로 언급한 기록과 1777년(정조 1), 이재(李縡)의 서원 건립을 요청하는 8도 유생의 상소에서 생전에 강학한 장소에 서원을 건립한 사례로 돈암서원을 거론한 내용을 들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세기 사림(士林)의 향촌(鄕村) 활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서원은 선조대 이후 사림 정치가 본격화함에 따라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돈암서원 설립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은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예학에 정통하여 조선 예학의 토대를 확립한 인물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서인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고, 향리인 연산에서 주로 학문과 교육으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李惟泰) 등 당대에 비중 있는 명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후일 호서예학파라 불리는 그의 문인들은 학문적 영향력과 함께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서인 집권 세력의 모태를 이루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직후 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1632년(인조 10) 사계의 문인과 인근의 유림들은 서원의 창건을 발의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중앙 집권 세력으로 부상했던 문인 집단의 위상에 걸맞게 서원의 건립에는 전·현직 관료와 지방의 사림들이 대거 참여하여 재원을 조달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634년 공역을 마치고 김장생을 제향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서원의 조직은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원장, 장의(掌議), 유사(有司), 직월(直月)을 기본 조직으로 하고 있고, 원장은 서인-노론계의 중망 있는 산림계 인사와 중앙 관료들이 임명되었다. 현전하는 『돈암서원지』의 「원장록」에 올라 있는 인물들을 살피면, 송준길, 이재, 박필주(朴弼周), 이기진(李箕鎭), 민우수(閔遇洙), 유척기(兪拓基), 송환기(宋煥箕) 등이다.

장의는 서원 소재 또는 인근 지역의 지방관을 차정(差定)하여 서원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보조하게 했는데, 연산과 함께 은진·공주·부여·금산 등지의 지방관을 장의에 임명하였다. 서원의 재정과 유생 공궤 등의 업무는 유사 2명과 직월 1명이 담당하였다. 서원의 원규는 따로 규정된 것은 없지만, 대체로 서인계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규약에서 많이 원용하였던 율곡(栗谷)이이가 지은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와 「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를 기본으로 하였다고 보인다.

변천

김장생 제향 이후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에서 사계 학맥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오다가 1658년(효종 9) 신독재(愼獨齋)김집을 추향하고, 1659년(효종 10) 돈암(遯巖)이라 사액을 받았다. 인조~효종대 김장생과 김집 부자를 제향하여 호서 지역을 대표하는 서인계 서원으로 존재했던 돈암서원은 숙종대에 들어와 노론의 핵심 서원으로 정치적 성향을 변화시켜 나갔다. 대체로 서원의 정치적 성향은 제향 인물의 성향에 좌우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돈암서원의 노론화는 1688년(숙종 14) 동춘(同春)송준길을 추향한 시기부터 본격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숙종 연간은 환국이 점철되는 와중에 중앙 정치 세력은 자파의 재향 기반 확보를 위해 각처에 서원을 건립하거나 추향을 통해 기존 서원을 포섭해 나갔다. 이러한 추이 속에서 송준길은 1685년(숙종 11) 연기(燕岐)의 봉암서원(鳳岩書院), 1686년 문의(文義)의 노봉서원(魯峰書院)에 연이어 향사되었고, 1688년에 이르러 돈암서원에도 합사(合祀)되기에 이른 것이다(『숙종실록』 14년 3월 7일). 이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노론 세력의 시도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정국이 급변하자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갑술환국 이후 송시열의 신원(伸寃)을 계기로 노론은 전국적으로 자파 서원을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1694년(숙종 20) 돈암서원에 송시열의 제향이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돈암서원은 김장생-송시열로 계승되는 노론계 학맥의 계승처이자 중앙 노론의 핵심 근거지로 부상하게 된다.

돈암서원의 영향력은 호서 지역을 넘어 호남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원에서 주관하여 조헌(趙憲)의 묘소 이장과 사우(祠宇) 이건에 대한 통문(通文)을 발하였고, 김상헌(金尙憲) 등 범기호계 인물들의 제사를 서원에서 지내게 한 것, 나주반간사(潘磵祠)의 향사홀기(享祀笏記)를 정할 때 돈암서원의 의례에 따르도록 한 예에서 그 위상을 살필 수 있다.

17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서원의 건립이 이루어질 때 그 지역에서 으뜸가는 역할을 담당하고 다른 원사(院祠)의 전범이 되는 서원을 수원(首院)이라고 명명한다고 할 때 돈암서원은 바로 그러한 위상을 점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를 토대로 돈암서원이 위치한 연산 일대는 김장생-송시열로 계승되는 서인·노론의 핵심 근거지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기호 사림의 구심체로 기능하였고 그 결속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지역 기반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호서 지역을 대표했던 돈암서원의 지위는 1696년(숙종 22) 청주(淸州)에 송시열을 독향(獨享)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이 건립되면서 변모한다. 중앙 정국에서 노론의 일당 전제(專制)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앙 노론 세력의 정치 명분 강화 작업의 일환으로, 송시열의 학문적인 권위와 정통성을 조선의 도학 전통을 넘어서 중국주자(朱子)의 계승자로 공인화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노론 세력은 명(明)의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萬同廟)와 화양서원을 결부시켜 청주 지역을 노론 의리의 성역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러한 노론의 정치·학술적 전통의 재정립 작업은 기존 충청도 서원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세기 노론 학계에서 경향(京鄕)으로 나뉘어 진행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전개 과정에서 노론의 정통을 자처했던 호서 지역 호론(湖論)의 중심지가 화양서원이었다는 점에서도 종전 돈암서원이 지녔던 정치·사회적 위상이 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

돈암서원은 기호 사림의 적통을 계승한 김장생을 제향한 도학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17세기 호서 지역을 대표했던 서원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현전하는 자료들은 매우 빈약하여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 충청남도 문화관광과·충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충남의 서원·사우』, 충청남도, 1999.
  • 이연숙, 「돈암서원의 건립과 성격」, 『간강권태원교수정년기념논총 민족문화의 제문제』, 1994.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