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서원(道峰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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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선조 6) 경기도 양주군 도봉산(현재 서울시 도봉구) 아래 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개설

16세기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된 서원은 이후 사림(士林)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경기 지역은, 명종대부터 퇴계(退溪)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사림 세력이 활발히 활동했던 영남에 비해 서원 건립이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선조 즉위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정암(靜庵)조광조의 독서처였던 경기도 양주군 도봉산 아래에 건립한 서원으로, 이듬해 도봉(道峰)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1696년(숙종 22)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을 추향함으로써 서울 지역에서 대표적인 노론 성향의 서원이 되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도봉서원에 대한 기사는 50여 건에 이르고 있다. 서원의 건립과 사액에 대한 기사, 숙종~영조 연간 도봉서원의 제향 관련 논란, 그리고 18세기 이후 왕의 특명으로 이루어진 서원 치제(致祭) 기사들이다. 이 중 1695년(숙종 21) 송시열의 도봉서원 입향(入享)을 둘러싼 갈등은 당시 중앙 정치 세력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큰 논란이 되었던 사건으로(『숙종실록』 21년 3월 26일), 도봉서원과 관련한 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광조가 독서하던 곳으로 일찍이 연고가 있던 경기도 양주군 도봉산 아래에 서원이 건립된 시기는 선조 초년이었다. 이 시기는 사림 정치가 본격적으로 실현되던 시기였다. 서원이 건립된 1573년은 선조 즉위 직후 권신(權臣) 체제의 청산이 가시화하던 시기였다. 율곡(栗谷)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류들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를 입은 사림들의 신원 회복과 사화 주동자의 완전 삭출[乙巳削勳]을 주장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신진 사류들은 조광조로 상징되던 도학(道學) 정치의 실현을 현실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때문에 조광조를 제향하는 도봉서원의 건립에 중앙 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계 관료와 조광조의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서원 건립 후 수찬김우옹(金宇顒), 부제학유희춘(柳希春), 부교리윤현(尹晛) 등이 당시 사림의 여론을 대변하여 서원의 사액을 청하였다. 이들은 서원이 도성 근처이며 첩설(疊設)이 불가하다는 선조의 반대에 대해 중국의 서원이 다수 병설되었음을 들어 거듭 요청하였고, 끝내 ‘도봉’이라 사액을 받아 내렸다(『선조실록』 7년 10월 10일)(『선조실록』 7년 10월 13일).

이후 1579년(선조 12) 율곡이이는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서 서원 건립의 의의에 대해, “도봉서원은 사림의 장수(藏修)와 도학을 강명할 도량으로 건립되었으니, 후대의 사류들은 정암 선생을 존숭하고 나아가 그가 남긴 도학을 오늘날에 실천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처럼 도봉서원은 선조 초년 사림들이 이념적 지표로 삼았던 조광조를 제향하는 장소로서 사림 정치의 본격적 도래를 알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도봉서원은 건립 후 성균관에 필적하는 동교(東郊) 지역의 유원(儒院)으로 존재했고, 경향 사림이 내방하며 경중(京中) 자제들을 위한 강학과 장수처로 기능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도봉서원의 조직은 서인계 서원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원장·장의(掌議)·유사(有司)로 구성된 서원의 조직에서 주목할 부분은 원장 유고 시에 그 임무를 대신하는 부원장을 설치한 점이다. 서원 운영의 측면을 살필 수 있는 원규(院規)와 학규(學規)는 숙종 연간 노론의 산림 권상하(權尙夏)가 원유(院儒)들에게 10여 조의 원규에 자문한 기록이 부분적으로 전하는데,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근간으로 하여 원규의 세목을 검토한 내용이다. 도봉서원의 원규와 학규는 대체로 서인계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규약에서 많이 원용하였던 율곡이이의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와 「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도봉서원의 재정은 건립 때부터 중앙 관인들이 높은 관심을 갖고 물력을 마련하였고 조광조의 문인과 사림들의 개인적인 부조도 이루어져 건립과 운영의 재원으로 활용하였다(『선조수정실록』 12년 9월 1일). 사액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특별히 호남의 면세지 100여 결(結)을 사급(賜給) 받아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동교에 있던 오위(五衛) 갑사(甲士)들의 목마장이 폐지되자 이항복(李恒福)이 도봉서원에 이 목마장을 주어 재원화하는 등의 지원이 이어졌다.(『현종개수실록』 2년 9월 20일)

변천

선조 연간부터 조짐을 보인 사림 내부의 분기는 붕당의 형성으로 표면화하였다. 사림 세력의 분열은 각처에 건립되던 서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앙 붕당들은 자파 세력의 학문적 정통성과 지역 기반 확보를 위해 서원을 중요시하였다.

경기 지역에서 중앙 붕당과 서원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처음으로 드러난 사건은 광해군 연간 조식(曺植)을 제향하는 백운서원(白雲書院)의 건립에서였다. 광해군 즉위 이후 등장한 북인 정권은 당시 퇴계·율곡 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학문적 기반과 자파 세력 확보 및 재강화를 위해 서원의 설립 및 사액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실제로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은 스승인 조식의 추존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경상도 각처에 서원을 건립했고, 1615년(광해군 7) 도성 근처인 양주에 조식을 제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여 이듬해 백운(白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당시 중앙의 서인과 남인계 신료를 비롯하여 경향 유생들은 이러한 북인들의 시도를 공박하였다. 같은 양주 관내에 있는 도봉서원은 이러한 추이 속에서 북인 세력에 대립하는 경중 사류의 거점으로 역할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백운서원은 곧 훼철되지만, 서원의 건립과 사액이 중앙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갔던 추이를 살필 수 있다. 인조반정 이후 도봉서원은 집권 서인계의 대표적 서원으로 자리했다. 당시 도봉서원의 운영에 관여했던 인물은 이항복·이정구(李廷龜)·이식(李植)·신익성(申翊聖)·이경석(李景奭)·송시열 등으로, 서원의 중건과 운영에 소요되는 물력을 지원하였고 강회에 참여하며 서원의 학풍을 이끌었다.

이후 환국(換局)이 점철되던 숙종 연간 도봉서원은 제향 인물을 둘러싸고 큰 논란을 맞이하였다. 서원 건립이 전대에 비해 급증하였던 숙종대는 서원 제향의 기준이었던 도학보다는 각 붕당을 대표하다 화를 입은 인물들에 대한 제향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이 조광조를 홀로 제향했던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제향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사(賜死)된 이후 다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정국이 반전되는 1694년(숙종 20) 복관(復官)되었다. 다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은 각처의 서원에 송시열을 제향하였고 이를 통해 정치적 명분을 확보하고 붕당의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였다.

1694년 5월 유학(幼學) 이숙(李琡)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제향하자고 주장하자 성균관의 유생들도 참여하여 제향의 필요성을 요청하였다(『숙종실록』 20년 5월 27일)(『숙종실록』 20년 8월 22일). 당시 상소의 주요 골자는 정암조광조와 우암송시열은 화를 당한 행적 및 학문과 절의가 동일하므로 서원에 제향하는 것이 마땅하며 위차(位次)는 병향(竝享)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송시열 등을 공격한 남인 세력을 중종 기묘년에 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 등과 같은 간당으로 몰아 정계에서 완전히 추출해야 한다는 노론의 기본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노론의 이러한 시도는 반대 정파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렀다. 환국 이후 정국을 담당하고 있던 남구만(南九萬) 등 소론 세력은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도처에 있으므로 거듭 설치하는 것을 금지한 조정의 금령을 위반한 점, 그리고 오랫동안 조광조를 홀로 제향했던 도봉서원의 위상을 고려하여 송시열의 입향론이 무리하다는 점을 거론하며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론계의 반대에 정시한(丁時翰) 등 경향의 남인 세력도 동조하여 도봉서원의 입향 시도를 비난하였다. 송시열의 제향을 둘러싼 논란이 중앙 정국에서 정파 간의 대립으로까지 확산되자, 환국 이후 정국 경색을 원하지 않던 숙종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일단 추향하는 것으로 미봉되고 만다.

하지만 도봉서원을 둘러싼 불만은 항상 대립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경종대 신축 옥사(辛丑獄事)를 거치며 정국이 다시 반전되어 노론이 대거 실세하게 되자, 도봉서원의 문제가 다시 재기되었다. 소론이 정국을 장악한 상황에서 1723년(경종 3) 관학 유생 김범갑(金范甲)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입향한 사실을 비난하자 곧바로 출향(黜享)을 결정하였다. 반대 정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서원 제향을 강행했던 일이 정치 상황이 급변하자 다시금 무산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출향 후 1년이 못 되어 경종이 훙서(薨逝)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바뀐 정세를 타고 송시열의 복향(復享)이 이루어졌다. 도봉서원의 송시열 제향을 둘러싸고 입향과 출향이 반복된 사실은 숙종대 이후 서원이 중앙 붕당의 세력 근거지로 변해 갔던 시대적 상황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이후 도봉서원은 18세기 이후 서원 금령이 엄격히 적용되던 상황에서 다른 지역의 서원과 같이 쇠퇴가 불가피하였다. 서원 본래의 기능인 강학은 퇴색하고 왕이 특명으로 내리는 치제(致祭)를 통한 정치적 의례가 주요한 사업이 되었다. 그러다가 도봉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만다.

의의

도봉서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서원이다. 현재 도봉서원 소장 고문서들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실록과 문집 등의 관련 기록을 종합한다면 도봉서원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함께 경기 지역 서원의 존재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 설석규, 「숙종대 원우동향과 붕당의 사회적 기반」, 『국사관논총』34, 1992.
  • 조준호, 「송시열의 도봉서원 입향 논쟁과 그 정치적 성격」, 『조선시대사학보』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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