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교(踏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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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는 세시풍속.

개설

답교(踏橋)는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는 풍속으로, 이를 행하면 일 년 동안 다릿병을 앓지 아니 하며, 열두 다리를 건너면 그해 열두 달 동안의 액을 면한다고 한다. 이를 주교(走橋)·다리밟기 등이라고도 한다. 서울에서는 광통교를 중심으로 열두 다리를 밟으면 그해의 재액을 면한다 하여 달 아래에서 즐거이 놀던 풍습이었다. 제석이나 정월 대보름 밤처럼 밤새 놀이가 있는 날은 왕이 특별히 명하여 야금(夜禁), 즉 통금을 해제하는데 이를 방야(放夜)라고 한다.

조선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답교는 중종 말년부터 서울 사람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보름날 저녁[上元夕]에 열두 개의 다리[橋]를 밟고 지나면 그해 열두 달의 재앙이 소멸된다.” 하여 생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부녀자들은 가마를 타고, 조금 천한 자는 비갑(比甲)을 머리에 쓰고 걸어서 밟으며, 서민의 부녀자는 모여서 떼를 지어 황혼(黃昏)을 타서 다리를 밟았는데, 혹시라도 밟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무뢰한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그 뒤를 따라 다녀서 그 모습이 대단히 추잡하였다. 명종 때에 이르러 대관이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니 부녀자의 답교 풍속은 드디어 끊어졌는데, 남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무리를 이루어 다리를 밟는 것이 지금까지 풍속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정월 보름에 답교하는 풍속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답교는 양제재환(禳除災患), 즉 재난과 근심을 없앤다고 믿었다. 중양절(重陽節)에 등고(登高)하는 의미와 유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일(盎葉記一)에서 「주교(走橋)」라는 제목으로 답교를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정월 보름날 밤이면 우리나라 남녀들이 성(城) 안의 큰 다리 위에서 노는데, 그것을 일러 ‘답교’라 하며, 답교놀이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릿병을 앓는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 연경(燕京)(현 북경)의 풍속인데, 명나라 완평 사람 우혁정(于奕正)이 저술한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대보름날 저녁이면 부녀들이 서로 떼를 지어 밤에 행보하여 질병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주백병(走百病)’, 즉 모든 병을 달아나게 하는 것이라 하고, 또 ‘주교’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정월 보름밤의 답교는 오랜 전통을 가진 대표적인 서울 풍속인데, 1560년(명종 15) 에 서울 안 남녀가 혼잡하게 모여 혹은 싸우기도 하는 등 경박하다고 하여 금지시켰다(『명종실록』 15년 5월 6일).

서유구(徐有榘)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이에 대한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상원답교(上元踏橋)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평소에도 남녀가 넘치고 인파가 밤이 다 되도록 그치지 않았을 정도였다. (명종 때) 이를 금하게 한 이후로 부녀 중에 다시 답교하는 자가 없었다(『지봉유설』 인용). 달이 뜬 후 도시민들은 종가(鍾街)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흩어져 모든 다리를 밟는데, 이렇게 하면 다릿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그리고 수표교가 가장 붐빈다. 이날 저녁에는 야금을 없애 주므로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피리와 북소리로 매우 소란하다. 중국에서도 부녀자들이 어울려 놀다가 다리를 지나며 ‘도액(度厄)’한다는 풍속이 있는데 우리의 답교 풍속이 이에 기원한다(『한양세시기』 인용). 정월 보름에 연등하는 풍속은 한나라 때 시작되어 당송 때 매우 성했다. 우리나라는 등석(燈夕) 행사가 4월 초파일로 옮겨져 대보름에는 조용해졌으며 오직 홍반(紅飯)을 먹고 다리 밟기 두 가지 일만 있다. 들과 밭 사이에는 통하는 길이 없어 광교 답교놀이도 황혼에 끝난다(『이운지』 권8, 「절신상락조」).”

위의 기사만으로는 답교 풍속이 언제 다시 행해지게 되었는지, 그 성격이 어떻게 변했는지 불분명하다. 오히려 아래의 문헌들을 검토해 보면, 명종 때 금지되었던 답교 풍속은 임진왜란 이후에 부활되었으며, 이전과는 달리 여자들이 놀이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고경명(高敬命)의 『제봉집(霽峰集)』「기상원답교(記上元踏橋)」의 주에 “답교라는 옛 놀이는 고려 때 시작되었다. 풍속이 이어져 얼마 전까지 최고로 성행했다. 특별히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태평성대에 있는 일이다. 법관이 엄하게 금하니 지금은 끊어져 볼 수 없다. 나는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어렸을 때도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니 벌써 서른 살이 되었다. 감개한 나머지 이 시를 쓴다.”고 하여 16세기 후반 경에 답교 풍속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미 소년 시절의 추억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 풍속이 다시 행해져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집』「답교곡삼수(踏橋曲三首)」, 홍세태(洪世泰)의 『유하집』 「원석답교가(元夕踏橋歌)」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속절잡희(俗節雜戲)」에도 “남자는 귀천을 물론하고 무리를 이루어 다리를 밟는 것이 지금까지 풍속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영조·정조 때의 기사들은 답교에 부녀자를 금했다는 내용이 없다. 특히 1770년(영조 46)에는 여자들이 예전에는 보름 다음 날인 열엿샛날 밤에 하였다는 언급이 있어, 이때가 되면 남녀 구별 없이 모두 답교놀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영조실록』 46년 1월 14일). 1791년(정조 15)에는 3일 간 야금을 풀고 숭례문과 흥인문의 빗장을 잠그는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성을 나가 답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가 되어 답교놀이가 도성 밖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정조실록』 15년 1월 13일).

답교 그림 중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는 「상원야회도(上元夜會圖)」가 있다. 19세기 초 문인화가인 누사(陋師)오계주(吳啓周)의 작품인데, 이 그림 속의 왼편에 홍백원(洪伯遠)의 「상원야회도서(上元夜會圖序)」가 있으며, 무정(茂亭)정만조(鄭萬朝)도 그림 상단에 화제를 달았다. 이 답교 풍속도를 보면 여자가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여자들이 답교놀이에서 배제되었다기보다는 남녀유별을 강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에 정월 16일 밤, 부녀들이 모두 집을 나가 답교놀이[走橋]를 하였는데, 다리를 건너지 못한 자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북경의 풍속이고, 서울에서는 상원일 밤에 남녀 모두 답교놀이에 참여하여 두 도시의 풍속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삼산재(三山齋)김이안(金履安)은 『삼산재집』에 「상원답교기(上元踏橋記)」라는 글을 남겼다. 그가 41세가 되던 1762년(영조 38) 정월 보름에 답교와 관련하여 겪었던 일을 적은 것인데, 이를 통해 당시 답교의 장소 및 풍경 등을 알 수 있다.

그는 달이 떠오르자 자신의 손님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거리에는 이미 사람들로 바다를 이루었다. 바로 서쪽의 동현(銅峴)으로 갔다가 북쪽의 종가(鍾街)로 향했다.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 뚫고 갈 수가 없었다. 서북쪽으로 더 가서 경복궁 앞길에 이르니 사람들이 조금 뜸했다. 잠시 배회하다가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누군가 다시 가 보자고 하여 궁월 담을 돌아 삼청동 입구에 들어섰다. (중략) 다시 큰 길로 나오니 창덕궁 앞길이다. 우여곡절 끝에 화격고(火擊皷) 앞에 앉으니 시각이 삼경사점(三更四點)이다. 파자교(把子橋) 위에 잠시 앉아 있다가 서쪽의 철모교(鐵冒橋)에 이르러 종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꽤나 시끄럽다. 그러나 이내 피곤하고 심심해져 포전(布廛)을 경유하여 귀가하였다. 무릇 역대로 대교(大橋)는 여섯 군데를 치는데, 소광통교·대광통교·혜정교·파자교·철모교·수표교 등이다.

‘사모답교(紗帽踏橋)’란 말이 있었다. 고위 관리들이 정월 보름밤을 맞아 대궐 앞 금천교(禁川橋)를 거닐며 서로 시 제목을 내고 이에 답하는 등 답교놀이를 하는 것을 말하였다. 영조 이후로 고위 관료부터 서울 장안에 사는 남녀 모든 사람이 통금이 해제된 가운데 답교놀이를 한 것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답교 풍속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 읍치에서도 행해졌다.

참고문헌

  • 『노가재집(老稼齋集)』
  • 『삼산재집(三山齋集)』
  • 『유하집(柳下集)』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제봉집(霽峯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패관잡기(稗官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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