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斷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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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병세가 위독할 때, 피를 내어 먹이려고 자기 손가락을 자르거나 깨물던 일.

개설

단지(斷指)는 손가락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모가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이 되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이거나 살을 태워 먹이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지극한 효행 중 하나로 인식되었으며,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정려(旌閭)를 세워 주거나 상을 내려 이를 표창하였다. 그밖에 형제나 남편을 위해 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단지는 굳은 맹세의 표시로 행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대개 부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효행의 하나로 등장한다. 단지에 대한 기사는 1432년(세종 14)에 처음 보이는데, 이때부터 그 지나침이 지적되었다. 예조 판서신상(申商)은 효자의 등급을 구분해서 정표(旌表)하고 관직을 내릴 것을 아뢰었다. 그러면서, 병든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약으로 드리는 일도 있는데, 이는 비록 중용의 도를 넘어서지만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니 상등(上等)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세종 또한 이는 비록 정도(正道)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마음이 절실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1월 28일). 이처럼 단지는 비록 절실하고 지극한 효행이지만, 지나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단지를 행한 인물을 서용하거나, 정려를 내리고 세금을 면제하는 등의 포상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해서 단지를 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충청도 홍산 출신의 전 사정(司正)탁희정(卓熙正)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아우의 병을 고쳤는데,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고 해서 서용되었다(『세종실록』 16년 4월 26일). 평안도 가산군의 금음도치(今音都致)라는 사람은 악질을 앓고 있었는데, 아홉 살 된 아들이 손가락을 잘라 그 병을 고쳤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문을 세우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세종실록』 21년 4월 3일). 또 평안도 안주의 향리(鄕吏)오유린(吳有麟)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약을 지어 바쳐서 간질에 걸린 아버지를 낫게 하여, 세금과 신역(身役)을 면제받았다(『단종실록』 2년 8월 17일). 그뿐 아니라 사노(私奴) 김석문(金石門)은 어머니가 갑자기 죽으려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살려 낸 효행을 인정받아 정표되었고(『중종실록』 6년 7월 6일), 개천(价川)의 막시(莫時)라는 양민 여성은 손가락을 잘라 남편을 구한 열부(烈婦)로 인정을 받았다(『중종실록』 23년 8월 21일). 중전이나 왕세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545년(인종 1)에 왕이 위독하자 중전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서 바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행하지는 못했다(『인종실록』 1년 6월 29일).

단지는 『삼강행실도』의 효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효행의 전형적인 예로, 『삼강행실도』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종 연간에 유학(幼學)유인석(劉仁碩)은 아버지가 광질(狂疾)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끊어 효험을 봤다는 『삼강행실도』의 이야기를 보았다. 이에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불에 태운 다음 빻아서 물에 타 드리니, 그 병이 나았다고 한다(『중종실록』 21년 7월 25일). 『삼강행실도』가 단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신체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과격한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앞서 세종의 언급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도에 합당하지 않다는 평가도 있었고, 잔인한 기질이 있는 자가 분을 이기지 못해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있으니 그 허실(虛實)을 가려서 표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3년 5월 21일). 그럼에도 단지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계속해서 효행의 지표로 인정을 받았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