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흠(盧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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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7년(중종22)~1601년(선조34) = 7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의병. 자는 공신(公愼), 호는 입재(立齋) · 만세(晩歲) · 죽천(竹泉)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합천 삼가(三嘉)이다. 아버지는 노수민(盧秀民)이고, 어머니 일직손씨(一直孫氏)는 생원 손세기(孫世紀)의 딸이다. 남명(南冥)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조식은 그의 청으로 노수민의 묘명(墓銘)을 짓기도 하였다.(『남명집(南冥集)』 권2)

인진왜란 때 의병 활동

1564년(명종1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 성균관(成均館)과 이조(吏曹)에서 추천하여 참봉(參奉) · 봉사(奉事) 등을 역임하다가,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향 삼가(三嘉)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과 싸웠다. 그때 경상도 삼가에서는 노흠 뿐만 아니라 학유(學諭)박사제(朴思齊) 형제가 의병을 모집하여 900여 명을 모았고,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 등도 각각 군사를 따로 모았다. 경상좌도관찰사김성일(金誠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召募官)으로 보내서, 관군과 의병이 연합하여 왜적과 싸우도록 하였다. 함안군수(咸安郡守)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이때에 다시 임소(任所)로 돌아왔으므로, 소모군 이정은 의병과 관군을 합쳐서 군사 1000여 명을 모집하여 군수유숭인에게 넘겨주면서 진해(鎭海) · 창원(昌原)에서 함안으로 침입해 오는 왜적들을 방어하게 하였다. 노흠 등 의병들은 싸움에 이길 적마다 그 공을 군수에게 돌렸다. 한편 박사제 형제는 봉사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서 그들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에 소속하도록 해서 영산(靈山)과 창녕(昌寧) 사이에서 왜적을 방어하였다. 삼가의 노흠 · 박사제, 고령(高靈)의 김면(金沔), 합천(陜川)의 정인홍(鄭仁弘), 현풍(玄風)의 곽율(郭*), 의령(宜寧)의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제일 먼저 의병을 모집하여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그들이 모두 조식의 제자로서 서로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노흠은 그 공로로 별제(別提)찰방(察訪)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시와 글씨에 능하였는데, 저서로는 『입재시고(立齋詩稿)』가 남아 있다.

제향

경상도 합천 삼가의 고암서원(古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난중잡록(亂中雜錄)』
  • 『남명집(南冥集)』
  • 『동계집(桐溪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학봉전집(鶴峯全集)』
  • 『첨모당집(瞻慕堂集)』
  • 『옥계집(玉溪集)』
  • 『덕계집(德溪集)』
  • 『농암집(農巖集)』
  • 『완정집(浣亭集)』
  • 『무민당집(无悶堂集)』
  • 『광주노씨세고(光州盧氏世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