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부사(內務府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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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개화·자강(自强) 정책 추진 기구인 내무부 관서의 당상관급의 총칭.

개설

내무부는 갑신정변 이후 갑오개혁 이전까지 존속한 기관이다. 내무부에서는 왕이 주도하는 정국 운영과 개화·자강 정책을 비롯한 국가의 기무(機務)를 총괄하여 살폈다. 내무부는 궁내(宮內) 사무를 관장했던 최고의 국정 의결 기구였다. 내무부에는 당상관급으로 총리, 독판, 협판, 참의를 두어 내무부에 소속된 7사(司)를 관장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내무부사(內務府事)라 하였다. 각각 총리내무부사, 독판내무부사, 협판내무부사, 참의내무부사로 불렸다.

담당 직무

내무부는 총리대신을 수반으로 해서 정·종1품의 독판, 정·종2품의 협판, 정3품 당상(堂上)의 참의 등과, 배경에 구애 없이 선발된 주사(主事)와 부주사 등의 당하관(堂下官), 그리고 하위 관리직(管理職)으로 구성되었다.

1) 총리내무부사

총리대신은 당상관에게 각 사(司)의 사무를 보고받아 중요 사안을 결정·처리하는 내무부의 최고위직이다. 대체로 의정부의 정승이 총리대신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총리대신은 내무부의 명목상 총괄자로서 왕의 정책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었다.

2) 독판내무부사

독판은 내무부 소속 7사의 업무를 총괄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각종 개화·자강 정책 추진 기구들이 내무부 소속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독판의 수가 늘어나 결국 각 사에 1명씩 배치되었다. 그 수는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7명 전후였고, 1893~1894년에는 9~14명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독판은 1887년(고종 24) 이후 민응식, 민영익, 민영환, 민영준 등 민씨 척족들이 차지하면서 군사와 재정 관련 부서의 직임을 겸직하였다. 내무부 독판직에 임명되었던 관리는 총 19명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여흥민씨를 비롯한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이었고, 과거 통리기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 등에 근무한 경력자가 많았다.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일본과 미국의 근대 문물을 접해보지 못하였고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개혁 의지가 약한 보수적 관료들이었다.

3) 협판내무부사

협판은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독판의 직무를 보좌하는 기능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이 내무부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사실상 내무부 업무를 관장하는 실세였다. 당초 11명이었던 협판의 수는 1885년 말에 12명, 1886년 13~18명, 1887년에 16~19명, 1888년에 14~20명, 1889년에 15~22명으로 점차 증원되어 1894년까지 이 숫자를 유지하였고, 대체로 각 사에 2명씩 배정되었다.

내무부가 존재했던 기간 중에 협판에 임명된 관리는 총 58명으로 여흥민씨를 위시하여 과거의 문·무과 출신 관리들이었다. 통리기무아문 계통의 신설 기구에 종사하거나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비교적 국제 정세에 밝고 개화·자강 사업의 실무 능력을 구비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내무부 산하의 전환국(典圜局)·기기국(機器局)·광무국(鑛務局)·연무공원(鍊武公院)·육영공원(育英公院) 등 자강 정책 추진 기구와 외국의 공사 관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일무 부관은 왕의 두터운 신임 속에 중앙과 지방 군영의 책임을 맡았다.

이외에도 데니([德尼], Denny, O.N.), 르장드르([李善得], LeGendre, C.W.),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 C. R.) 등 미국인 고문관이 내무부 협판으로 기용되었다. 이들은 원세개(袁世凱)의 조선 내정 간섭이 심해지는 가운데 이를 견제하면서 고종의 반청(反淸) 정책 추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4) 참의내무부사

참의는 협판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한 관리였다. 내무부 창설 당시에는 4명에서 출발하였지만 대체로 1887년부터는 각 사에 1명씩 배치되었다. 참의를 역임한 인물은 1894년까지 모두 31명으로 통리기무아문이나 통리군국사무아문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나중에 협판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독판이나 협판과 달리 서자(庶子)·중인(中人) 혹은 변방의 토반(土班)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외국어에 능통하거나 개화 추진 능력을 인정받아 기기국·전환국 등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치·사회 제도에 대한 개혁 의지와 반청 사상이 강하여 내무부 예하의 개화·자강 정책 추진 기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청·친미·친일 외교를 펼쳐나가는 데 앞장섰다.

내무부사는 상피(相避) 제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의 경기감사나 4도(都)의 유수직을 겸임할 수 있었다. 또 군사와 재정을 관할하는 병조 판서와 중앙 군영의 지휘관인 영사(營事), 호조 판서와 선혜청 당상 등이 으레 내무부사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승정원의 도승지(都承旨)도 내무부사를 겸직하도록 하여 왕의 국정 운영 주도권을 뒷받침하였다.

내무부는 소속 각 사를 당초 7국(局)으로 나누었다가 곧바로 7사로 개편하였다. 7사는 직제사(職制司)·수문사(修文司)·지리사(地理司)·농무사(農務司)·군무사(軍務司)·전헌사(典憲司)·공작사(工作사)였다.

내무부사의 직무는 소속 당시 내무부가 왕에게 올린 계문(啓聞)을 보면 알 수 있다. 내무부에서는 ① 군수·군영의 설치, 군사훈련과 군사교육, 기타 군정 일반 업무를 포함하여 군사 관계 업무 총괄 ② 내무부와 관할 관서뿐만 아니라 지방관과 외교관까지 관리에 대한 인사 고과 업무 ③ 수세(收稅)·전운(轉運) 등 재정 관련 업무 ④ 국경·도서(島嶼) 등 변경 지역에 관한 업무 ⑤ 농업·상업·광업에 관한 진흥·관리 업무 ⑥ 도적의 체포와 사건 조사·형벌에 관한 업무 일부 ⑦ 교육에 관한 업무 ⑧ 왕실 재정과 관련된 업무 ⑨ 교섭통상사무아문의 업무에 대한 관여·통제 등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였다.

변천

내무부를 통해 국정 전반의 운영을 주도했던 고종과 민씨 척족 세력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외정을 간섭하는 가운데 권력 보존의 근간이 되는 재정·군사권을 장악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의정부 대신들이 강한 비판을 제기하는 등 왕 주도의 자강 정책 추진 방법을 두고 고종과 대신들은 상당한 갈등을 보였다. 그 중심에 내무부사가 있었던 셈이었다. 이들 내무부사는 1890년대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지원군을 청하는 등 친청(親淸)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결국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 개화·자강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894년 7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군국기무처가 내정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무부가 폐지되고 내무부사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김필동, 「갑오경장 이전 조선의 근대적 관제 개혁의 추이와 새로운 관료 기구의 성격」, 『사회와 역사』 33, 1992.
  • 은정태, 「고종 친정 이후 정치 체제 개혁과 정치 세력의 동향」, 『한국사론』 40, 1998.
  • 한철호, 「민씨 척족 정권기(1885~1894) 내무부의 조직과 기능」, 『한국사연구』 90, 1995.
  • 한철호, 「민씨 척족 정권기(1885~1894) 내무부 관료 연구」, 『아시아문화』 12,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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