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은(納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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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하고 부족한 재정을 보전하기 위하여 은의 납부를 권장하고, 일정량의 은을 바치는 사람에게 포상하던 일.

개설

재정적 이유로 은을 모금하는 정책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시행된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사신 접대와 궁궐 영건사업을 위해 선조·광해군대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은을 납부하는 자에게는 납속(納贖)을 하는 사람과 같이 각종 포상을 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이용하여 관직을 얻는 사람도 많았다.

내용 및 특징

은을 바친 사람을 포상하는 정책은 넓게는 납속정책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책은 은이 귀하였기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지역이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관직을 팔아 은을 모금하는 납은배관제(納銀拜官制)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재정 확보책으로 꾸준하게 시행되었다.

납은정책은 특히 임진왜란을 계기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전란 중이었던 1594년(선조 27) 5월에 비변사는 국용(國用) 타개를 위해 함경남도 단천 은광(銀鑛) 개발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본읍 사람 가운데 은전(銀錢)을 바치고 면역(免役)·면천(免賤)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50냥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면역, 70냥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면천해 주는 정책을 시행하였다(『선조실록』 27년 5월 25일). 전란 중에 계속된 은 모으기 정책은 전후에도 궁궐 조성사업에 따른 재정 확보와 대명 외교 사신 접대에 필요한 은의 확보를 위해 또 다른 「납은사목(納銀事目)」을 제정하는 형태로 이어졌다(『선조실록』 39년 4월 21일).

광해군대에는 궁궐 영건사업이 확대되고 명나라 사신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은의 수요는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돌·철·목재·포목 등과 함께 은을 모으기 위한 도감(都監)을 두고 사목(事目)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은을 바치는 사람에게 실직(實職)을 제수(除授)하고 그 외 허통(許通)·면죄(免罪)의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하였다. 광해군 말년이 되면 왕은 은을 마련해 낼 계책으로 종실(宗室) 가운데 은을 바친 사람을 군(君)으로 봉(封)하고 승직(陞職)시켜 주었다. 생원·진사·음관(蔭官)이 은을 납부하는 데에 따른 사목 제정을 독촉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4년 4월 23일).

이에 따라 은을 내고 허통·면천·면죄하는 사람과 함께 관직에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즉, 은을 바치고 당상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사람이 연줄을 잡아 실직에 들어가고 녹봉까지 받았다(『광해군일기』 2년 7월 12일). 또한 은을 바친 것을 계기로 외직으로는 수령, 내직으로는 순장(巡將)·내삼청(內三廳)·도총부(都摠府) 등의 서반 실직 당상(堂上)에까지 오르는 사람이 다수 존재하였다.

변천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불안정하였던 광해군대를 지나게 되면서 납은정책은 진정되었다. 인조 초반에는 광해군대 은을 내고 상을 받은 자들에 대한 쇄신(刷新) 노력이 이루어지면서, 재정 보전을 위한 납은정책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1669년(현종 10) 평안도 별시 무과 급제자의 부방(赴防)을 면제하는 대신 은을 내게 하는 조치 정도가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박용숙, 「조선 왕조의 납속보관고(納粟補官考)」, 『(부산대학교)논문집』, 1975.
  • 문수홍, 「조선시대 납속제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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