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도(金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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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의 금산·지례·거창·성주·고령·인동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한 역도.

개설

김천도(金泉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로, 금산의 김천역(金泉驛)을 중심으로 경상도에 편성되었다. 본역인 김천역에는 찰방(察訪)이 주재하며 역무를 관할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금산의 김천역(金泉驛)·추풍역(秋風驛)·문산역(文山驛), 성주의 답계역(踏溪驛)·안언역(安彦驛)·무계역(茂溪驛)·고평역(高平驛), 고령의 안림역(安林驛), 합천의 금양역(金陽驛), 개령의 부쌍역(扶雙驛), 인동의 동안역(東安驛)·양원역(楊原驛), 초계의 팔진역(八眞驛), 거창의 무촌역(茂村驛)·성기역(星奇驛)·성초역(省草驛), 함양의 권빈역(勸賓驛), 개령의 양천역(楊川驛), 대구의 금천역(琴川驛), 지례의 작내역(作乃驛)·장곡역(長谷驛) 등 21개 속역으로 구성되었다.

김천도에 속한 역로(驛路)는 금산-지례(知禮)-거창(居昌)-합천(陜川) 방면과, 금산-성주(星州)-고령(高靈)-초계(草溪) 방면, 그리고 금산-인동(仁同)-칠곡(漆谷) 방면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김천도는 오늘날의 경상북도 김천시에 해당하는 금산을 중심으로 거창·합천 및 성주·고령·초계, 인동·칠곡 등을 연결하는 역과 역로를 관할하였다. 1413년(태종 13) 10월에 김천도에 역승(驛丞)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1413년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천도는 세종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바와 같이 금산의 김천역·추풍역·금산신역(金山新驛)을 포함하여 성주의 답계(踏溪), 안언(安偃), 무계(茂溪) 및 설화(舌化), 팔여의 팔여신역(八莒新驛), 고령의 안림(安林), 개령의 부쌍(扶雙)과 양천(楊川), 대구의 범어(凡於), 하빈신역(河濱新驛), 인동의 인동신역(仁同新驛)과 약목신역(若木新驛), 지례의 작내(作乃) 및 장곡역(長谷驛) 등 17개의 역이었으며, 특히 팔여, 금산, 하빈, 인동, 약목의 신역이 설치된 점이 특징이다.

한편, 1460년(세조 6) 2월에 병조의 주장으로 김천도의 16역과 사근도의 15역을 통합하여 사근도라 하고 역승 대신 찰방을 임명하였다가 1462년(세조8) 8월에 병조의 건의로 역도를 재정비한 결과 김천도로 다시 개칭되었다. 속역은 김천역(金泉驛)·문산역(文山驛)·추풍역(秋豐驛)·작내역(作乃驛)·장곡역(長谷驛)·무촌역(茂村驛)·생초역(省草驛)·성기역(星奇驛)·답계역(踏溪驛)·안언역(安彦驛)·무계역(茂溪驛)·설화역(舌化驛)·고평역(高平驛)·양원역(楊原驛)·동안역(東安驛)·양천역(楊川驛)·부쌍역(扶雙驛)·안림역(安林驛)·팔진역(八鎭驛)·권빈역(勸賓驛)·금양역(金陽驛)이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리하여 성종대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김천(金泉)·추풍(秋風)·답계(踏溪)·안언(安彦)·무계(茂溪)·안림(安林)·금양(金陽)·부쌍(扶雙)·동안(東安)·팔진(八眞)·무촌(茂村)·고평(高平)·양원(楊原)·권빈(勸賓)·성기(星奇)·양천(楊川)·금천(琴川)·문산(文山)·작내(作乃)·장곡(長谷)·성초역(省草驛)을 속역으로 하였다. 세종대와 차이점은 대구 방면으로 범어역 대신 금천역(琴川驛)이 신설되고, 인동에 신역으로 설치된 약목신역이 폐지되고 대신에 동안역(東安驛)과 양원역(楊原驛)이 신설되었다. 합천에는 금양역(金陽驛)이 신설되고, 초계의 팔진역(八眞驛) 신설되었으며, 거창에 고려시대 설치되었던 무촌역(茂村驛), 성기역(星奇驛)이 다시 설치되고, 거창과 영동 사이에 성초역(省草驛)이 신설되고, 합천과 거창 사이에는 권빈역(勸賓驛)이 신설된 점이다.

이와 같은 김천도의 역로상의 위치는 경상우도의 소로(小路)에 해당되었으나, 신경준의 『도로고』에 의하면 부산포(釜山浦)-양산(梁山)-김해(金海)-창원(昌原) 자여역(自如驛)-영산(靈山) 영포역(靈浦驛)-창녕(昌寧)-현풍(玄風)-무계역(茂溪驛)-부상역(扶桑驛)-김천역(金泉驛)-추풍역(秋風驛)-황간(黃澗)-영동(永同)-옥천(玉川)-문의(文義)-청주(淸州)-진천(鎭川)-죽산(竹山)-양지(陽智)-용인(龍仁)-낙생역(樂生驛)-양재역(良才驛)-도성에 이르는 사행로의 우로(右路)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상의 요충지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김천도는 고려시대의 경산부도(京山府道)와 산남도(山南道)가 조선전기 태종대에 개편되면서 성립되었다(『태종실록』 13년 10월 22일). 그 뒤 1457년(세조 3)과 1460년(세조 6)에 사근도로 통합되었다가, 1462년(세조 8)에 다시 김천도로 독립되었다. 김천도의 속역은 다음 <표1>에서 보듯이, 세종 연간에 17개 역, 성종 연간에 21개 역, 영조 연간에 19개 역 등으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존속하였으나, 고종 연간의 20개 역을 마지막으로 1896년(건양 1)에 폐지되었다.

변천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역승을 파견하고 정역찰방제를 시행하다가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찰방제로 변호하였다. 한편, 지례의 장곡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이 두의곡역(頭衣谷驛)을 거쳐 조선시대에 장곡역으로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대에 김천도에 설치된 금산(金山) 신역은 문산역(文山驛)으로, 인동(仁同) 신역은 양원역(楊原驛)으로, 약목(若木) 신역은 동안역(東安驛)으로, 팔여(八莒) 신역은 고평역(高平驛)으로, 하빈(河濱) 신역은 금천역(琴川驛)으로 개칭되어 성종대의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성현도(省峴道)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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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해동지도(海東地圖)』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조병로, 「조선후기 「金泉道形止案」을 통해본 驛民의 구성과 직역변화」, 『경주사학』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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