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전(箕子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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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에 기자조선을 개창한 기자(箕子)를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평양을 비롯한 각 지방에 세웠던 사당.

개설

기자전(箕子殿)은 처음에는 기자묘(箕子廟)로 건립되었다. 기자묘는 1102년(고려 숙종 7) 정당문학 정문(鄭文)의 건의로 1107년에 건립되었다. 이후 고려의 잡사(雜祀)에 포함되어 명종 때는 제사를 위한 토지 50결이 지급되었고, 공민왕 때는 두 차례에 걸쳐 기자묘가 수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崇儒) 정책으로 기자가 존숭되면서 기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기자전(箕子殿)로 불리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기자전의 신위판(神位版)에 ‘조선후기자지위(朝鮮侯箕子之位)’라 쓴 것을 조선의 사전(祀典) 의식에 따라 ‘후조선시조기자(後朝鮮始祖箕子)’라 고쳐 쓰게 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6일).

각 지역에도 기자전을 둔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永興)에 준원전(濬源殿)과 함께 기자전을 세우고 시위호군(侍衛護軍) 두 사람을 두어 수호하게 하였다. 충청도 직산(稷山)에도 기자전을 두고 노비 2명을 수직(守直)시킨 기록이 보인다.

세종 때에는 기자묘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우고 참봉 2명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1412년(태종 12)부터는 기자사에 단군을 함께 배향했는데, 1429년(세종 11)에는 기자 사당 남쪽에 단군 사당을 별도로 지어 독립시켰다. 중국 사신이 평양에 도착하면 기자묘를 배알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또 단군묘(檀君廟)를 배알하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위치 및 용도

평양에 있던 기자전은 평양성 밖 기림리(箕林里)기자묘(箕子墓) 옆에 있었다. 기자묘는 평양 부성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었는데, 정자각(亭子閣)·석인(石人)·석양(石羊)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은 성안 의리방(義理坊)에 있었다고 한다.

변천 및 현황

1612년(광해군 4) 평양에 있는 기자사를 숭인전(崇仁殿)으로 고쳐 사액(賜額)하고, 선우식(鮮于寔)을 기자의 후손이라 하여 정6품 숭인감(崇仁監)에 임명해 그 직을 세습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3년 10월 14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이후에는 평안감사가 선우씨 가운데서 추천해 임명하게 하였다. 그 뒤 1637년에는 없어진 묘정비를 다시 세우고 숙종·영조 때는 여러 차례 조신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형태

기자전은 정전(正殿)이 3가(架)로 이루어진 세 칸, 동·서로 행랑이 각각 세 개이며, 신문(神門)이 세 개, 동·서로 좁은 문이 각각 하나이고 대문이 셋이었다. 비각(碑閣)은 세 칸으로 소문(小門)이 두 개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선조 때 조정에서는 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이라 하였다. 이 중 선우가는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했다는 것이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箕子枝裔多髯翁]"고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는 말이 전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평양지(平壤志)』
  • 『영흥부읍지(永興府邑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기자실기(箕子實記)』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우근, 「조선 왕조 초기에 있어서의 유교 이념의 실천과 신앙·종교-사제(祀祭)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사론』3,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