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가(給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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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급가 |
한글표제 | 급가 |
한자표제 | 給暇 |
동의어 | 급한(給閑), 사가(賜暇), 식가(式暇) |
관련어 | 청가(請暇), 휴가(休暇) |
분야 | 정치/인사/관리 |
유형 | 법제·정책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임민혁 |
시행기관 | 이조(吏曹), 병조(兵曹)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급가(給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3월 14일, 『세종실록』 5년 1월 20일, 『세종실록』 24년 1월 11일, 『세종실록』 29년 2월 2일, 『세종실록』 26년 7월 4일, 『태종실록』11년 윤12월 23일, 『태종실록』 15년 1월 15일, 『세종실록』 17년 9월 6일, 『세종실록』 7년 1월 24일, 『태종실록』 16년 3월 10일, 『세종실록』 3년 2월 6일, 『세종실록』 10년 4월 19일, 『성종실록』 21년 2월 2일, 『성종실록』 20년 6월 5일, 『세종실록』 4년 10월 8일, 『세종실록』 13년 2월 25일, 『세종실록』 8년 4월 17일, 『성종실록』 4년 12월 15일, 『정조실록』 12년 2월 10일 |
조선시대에 공무 담당자에게 여러 사유로 휴가를 주던 제도.
개설
급가는 이조(吏曹)에서 담당하였으며 종친(宗親)의 휴가는 종부시(宗簿寺)에서 관장하였다. 급가는 사고가 있는 자는 왕에게 보고하고 휴가를 얻는 제도인데, 관련 법규는 대부분 태종·세종 연간에 제정되었다. 혼례와 상사(喪事), 제사 등의 애경사와 질병, 노부모의 봉양 등이 주된 사유였으며, 효와 예를 중시하는 종법 사회에서의 특징이 드러나는 근친(覲親)·소분(掃墳)의 법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의 습사(習射) 후의 휴가나 조사(朝士)의 과거 응시 휴가가 있었으며, 특히 공노비의 출산 휴가도 시행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후 가례에 의한 종법 사회 질서의 확립 과정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의 안정·조화를 위하여 여러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중 가례를 실천하기 위하여 제정된 규범이 관혼상제를 위해서 휴가를 주는 제도였다. 몸에 병이 들었거나 공무를 담당한 후에 주어지는 휴가, 출산 휴가 등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실현하는 기본권이었다. 따라서 절기마다 지내는 제사인 시향(時享)을 위한 휴가나 관원에게 규정된 정식 휴가인 식가(式暇), 상례(喪禮)를 위한 휴가인 복제(服制), 질병으로 인한 휴가는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허락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 사회의 성격을 잘 보여 주었다.
내용
급가는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방향에 중점을 두어 제정된 점이 특징이었다. 그리하여 시향·식가·복제를 사유로 할 때에는 왕에게 아뢰지 않아도 휴가를 허락하였으며, 여기에 질병으로 인한 휴가가 추가되었다.
근친(覲親)은 3년에 한 번, 소분(掃墳)은 5년에 한 번, 그리고 영친(榮親)과 영분(榮墳)·분황(焚黃)·혼가(婚嫁)에는 모두 7일을 허락하였다. 처나 처부모의 장례에는 모두 15일을 주었다. 기일(忌日)에는 2일의 휴가를 주었는데 증조모 이하나 사당에 함께 모신 모(母)·외조부모·처부모의 기일에도 모두 같았다. 사당에 함께 모신 모(母)는 곧 2처(妻) 이상자를 말하였다. 부모의 상중(喪中)에 복직한 관리에게는 삭망(朔望), 대소상(大小祥) 등의 제사에 3일의 휴가를 주고, 담제(禫祭)에는 5일의 휴가를 주었다. 시제(時祭)에는 주제자(主祭者) 및 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 중자(衆子)에게 모두 2일의 휴가를 주고, 장손(長孫) 및 동증조(同曾祖) 이하의 부(父)가 죽은 중장손(衆長孫)에게는 1일의 휴가를 주었다.
교화 정책을 가장 중시한 조선 정부에서는 부모의 봉양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70세 이상의 부모를 상시 봉양할 수 있도록 아들에게 휴가를 주었는데 70세 이상에는 한 아들이, 80세 이상에는 두 아들이, 90세 이상에는 여러 아들이 돌아가서 봉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부모의 연세에 따라 여러 아들에게 봉양의 책임을 부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모의 병환으로 휴가를 신청하였을 때에는 원거리에 70일, 근거리에 50일이었으며, 경기도는 30일을 주었고, 외관(外官)의 경우에는 관찰사가 그 노정(路程)을 헤아려서 기간을 정해 주었다.
군사(軍士)의 경우에는 병을 신고하였을 때 병조(兵曹)에서 그 사실을 조사 확인한 후에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입직(入直)하는 군사는 도총부(都摠府)에서 사실을 조사 확인하여 병조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다. 부모의 병환에는 서울에 사는 자는 본부(本部)에 신고하고, 지방에 사는 자는 본읍(本邑)에 신고하며, 수령의 아들일 경우에는 이웃 읍(邑)에 신고하여 사실을 조사 확인하고 전보(傳報)하게 하되, 모두 병조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다.
휴가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문무 관원은 모두 교체하였다. 자신의 질병 때문이라도 곧바로 교체하였다. 녹(祿)을 받는 군사가 이유 없이 만 25일, 사유가 있어 만 40일을 결근하거나, 녹을 받지 않는 군사가 이유 없이 만 30일, 사유가 있어 만 50일을 결근하면 모두 장(杖) 80에 처하고 근무 일수를 삭감하였다. 충의위(忠義衛), 충찬위(忠贊衛), 충순위(忠順衛), 족친위(族親衛)는 근무 일수만을 삭감하였다.
변천
조선초부터 급가 논의는 유교 윤리와 가례(家禮)의 실천 및 사기 진작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졌으나 그 과정이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근친(覲親) 급가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관원이 어버이의 병환을 돌보고자 한다면서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정부에서는 그 사직서를 돌려주고 본직(本職)에 나오게 하였는데, 1414년(태종 14)부터는 사직서를 올리지 말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4년 3월 14일). 그래도 모든 관원은 병든 어버이를 돌보기 위하여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을 관행처럼 행하였다. 그러자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정부에서는 길의 원근을 헤아려 날짜를 따져 휴가를 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세종실록』 5년 1월 20일).
이러한 근친법은 『속이전(續吏典)』에서 문무관의 부모가 외지에 있는 자는 3년에 한 번 부모를 찾아가 뵙고, 부모가 이미 죽은 자는 5년에 한 번 가서 성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법에 의거해 부모를 뵙는 것은 만 36개월, 성묘하는 것은 60개월 등 달수로 계산되었으나 1442년(세종 24)에 연수로 계산하여 말미를 주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4년 1월 11일).
수령과 만호가 부모의 병으로 휴가를 청할 때에는 각기 그 도의 감사에게 청가(請暇)의 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그러면 감사는 그 노정(路程)의 멀고 가까운 것을 헤아려 3일 이상의 노정에는 30일을 주고, 6일 이상의 노정에는 40일을 주며, 10일 이상의 노정에는 50일을 주고, 15일 이상의 노정에는 70일을 주었다. 아내의 병에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세종실록』 29년 2월 2일). 1423년(세종 5)의 제도가 이때에 와서 보다 진전되어 노정의 일수에 따라 휴가 일수를 확정한 것이었다.
부모를 뵙거나 성묘하는 법은 군사(軍士)의 경우 1407년(태종 7) 9월에, 그 이전부터 시행되어 온 갑사의 급가법을 따르도록 하였다. 심지어 외방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거나 안치(安置)된 도역인(徒役人)에게도 유형수(流刑囚)를 제외하고 80세 이상 된 부모가 있으면 1년에 한 번 찾아가 뵙도록 5일 동안의 휴가를 주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4일).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상복에 따른 기간에 차이가 있어 휴가 일수에도 차등을 두었다. 부모와 조부모의 상에는 3년의 휴가를 주었지만 실제로는 3년 안에 관직에 나오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상에는 본래 30일을 휴가로 주었으나 1411년(태종 11)에는 처부모를 위한 소공(小功)의 상복에 15일을 주는 것으로 바꾸었다(『태종실록』11년 윤12월 23일). 1415년(태종 15)에는 외조부모의 대공(大功)에 20일을 주었다(『태종실록』 15년 1월 15일). 『속전등록(續典謄錄)』에는 ‘외조부모의 상에는 정복(正服) 소공 15일 외에 휴가 15일을 더 주고, 처부모의 상에는 정복 시마(緦麻) 7일 외에 휴가 23일을 더 준다.’ 하였다. 총 30일로 상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더 준 휴가의 사용은 자원(自願)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7년 9월 6일).
조선초기에는 혼사에 따른 휴가도 주었던 듯하다. 그런데 1425년(세종 7)에 수령의 딸이 혼인할 때 주던 급가를 없앴다(『세종실록』 7년 1월 24일).
군사들은 특수 직역군이어서 관원과 비교하여 급가법에 차이가 있었다. 활쏘기를 연습하는 습사(習射) 기간 중에 휴가를 주는가 하면(『태종실록』 16년 3월 10일), 군사의 부모가 병이 있는 자는 휴가 신청서인 진성(陳省)을 병조에 제출해야만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부모·조부모의 상에는 100일의 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시위 군사들의 대소상과 담제에는 『경제육전』에서 ‘상중에도 관직에 나온 경우에는 대소상 제사에 3일 동안 휴가를 주고, 담제에는 5일 동안 휴가를 준다.’라고 한 예에 따라 휴가를 주었다(『세종실록』 3년 2월 6일).
외방에 사는 군사가 결혼할 경우에도 진성을 병조에 제출하여야 했다. 그러면 원근을 참작하여 휴가를 주고 결혼한 뒤에도 10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0년 4월 19일). 진성의 제출은 이를 사칭하여 휴가를 받아 가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내금위 등도 어버이 병의 사칭을 막고자 고을의 공첩(公牒)을 상고하여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성종실록』 21년 2월 2일). 양계(兩界) 연변의 장수는 휴가를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 20년 6월 5일). 『만기요람』 「군정편」에는 장관과 군교의 휴가에 관한 공통 규정과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휴가에 관한 세부 사항이 수록되어 있었다.
성균관의 생원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생도에게도 매월 초8일과 23일에 휴가를 주었다(『세종실록』 4년 10월 8일). 종학(宗學)에 나가는 종친에게는 매월 초8일과 15일, 23일에 휴가를 주었다(『세종실록』 13년 2월 25일).
경외 관공서의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는 것을 규정으로 삼았다(『세종실록』 8년 4월 17일). 또 산기(産期)에 임하여서는 1개월 동안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었다. 사역인(使役人)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일을 하게 하였다.
또 조사(朝士)는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에 입격(入格)하였을 경우에 회시(會試)까지 휴가를 주었다. 성종대에는 새로 제정한 대전(大典)의 시행 규정에 따라 복시까지 휴가를 준다면 오래 관을 비워 두고 직무를 폐하게 된다며 복시 전 50일 동안만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성종실록』 4년 12월 15일). 홍문관 관원에게는 세종 연간에 처음으로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였는데, 성종대에는 독서당을 설치하여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시행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급가법의 보완이 부모의 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705년(숙종 31)에 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에게도 성복(成服) 때에 한하여 계품(啓稟)해서 보석해 주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장용영의 군사에게는 부모의 상에 100일의 휴가를 주었다(『정조실록』 12년 2월 10일). 이처럼 급가는 관련 제도와 의식의 변화에 따라 신축성을 보이면서 조선말기까지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