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문(金虎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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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창덕궁 서쪽 행랑의 출입문으로 주로 관료들이 이용한 문.

개설

금호문은 창덕궁이 건설되면서 함께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호문이라는 명칭은 이미 중국 당나라 서쪽에 위치한 궁성문을 지칭하던 것이었다. 창덕궁 금호문의 경우 당초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 국왕의 지시로 서거정(徐居正)이 대궐의 문 가운데 호칭이 없는 문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금호문이라 불렸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금호문을 열고 닫을 때에는 도총부(都摠府) 낭청(郞廳) 1명과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司鑰) 1명이 관장하였다(『성종실록』12년 1월 12일). 이후 1784년(정조 8)에 제정된 감문절목(監門節目)에서는 변동이 되어 금호문은 주서(注書)가 관장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8년 5월 22일). 금호문을 지키는 군사는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병조(兵曹) 소속의 기병(騎兵) 13명,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파총(把摠) 1명, 초관(哨官) 1명, 보군(步軍) 100명 등이 수비하였다.

위치 및 용도

금호문은 창덕궁 서쪽에 위치한 행랑의 출입문으로, 조정 관원들이 주로 출입하는 문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정조 연간에 이르면 궁궐의 각 문에 출입하는 대상자가 관행적으로 고정되기도 하였는데, 창덕궁 소재 궁문의 경우 돈화문(敦化門)은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관리인 대간(臺諫)이, 금호문은 조정 관리인 조신(朝臣)이, 단봉문(丹鳳門)은 내시부 소속의 관리들인 중관(中官)이, 선인문(宣仁門)은 궁중의 말이나 가마를 담당하던 사복시(司僕寺) 관원들만이 출입해야 하는 것이 관행화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를 금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정조실록』 13년 1월 19일).

야간에도 관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었고(『인조실록』 17년 10월 15일), 흉서가 투입되기도 하였으며(『광해군일기』 10년 3월 24일), 과거 시험 때에는 응시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24년 9월 9일).

변천 및 현황

연산군대에는 금호문의 수비를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예에 따라 수직군사 60여 명에게 창과 칼 등을 소지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2월 10일). 1645년(인조 23)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인근에 있는 서연청(書筵廳)에서 세자가 강독을 하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폐쇄하고 대신 단봉문을 개방한 적도 있었으나(『인조실록』 23년 10월 22일), 일시적인 조치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개방되었다(『인조실록』 26년 10월 17일). 금호문은 이후에도 몇 차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하였다.

형태

금호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솟을 대문 양식이다.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용마루 양쪽 끝에는 용두를 놓았다.

관련사건 및 일화

금호문은 정치적으로도 주목되는 문이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의문(彰義門)을 지나 궁궐로 들어간 문이 금호문으로, 당시 금호문 수문장박효립(朴孝立)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맞이했다. 금호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간 반정군은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 것은 반정군들이 가족들에게 “궁중에서 불이 나지 않으면 모두 달아나서 빠져 죽으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1721년(경종 1) 노론 측에 의해 왕세제의 대리청정이 시도되었을 때, 소론 측에서 이 시도를 막기 위해 창경궁에 있는 국왕을 면대할 때 이광좌(李光佐) 등이 이곳을 통해 들어가 청대(請對)하여 노론 측의 시도를 막은 적이 있었다(『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또는 관원들이 대명(待命)할 때도 금호문 앞이 활용되었다(『정조실록』12년 2월 1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동야승(大東野乘)』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주남철, 『한국의 문과 창호』, 대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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