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량진(廣梁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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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대동강 하구에 설치된 수군진.

개설

광량포는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대동강 하구에 있는 포구이다. 조선전기에 광량포는 왜인을 방비하기보다 육지에 있는 평안남도 안주지방을 방어하는 데 주력하였다. 16세기에 광량포에 수군진이 설치되어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바닷길을 관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량포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이다. 1445년(세종 27)에 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 황보인(皇甫仁)이 ‘호도(虎島)에 있는 평안도수영(水營)을 대동강 하구에 있는 광량포로 이전하자.’라고 제안한 데서 확인된다(『세종실록』 27년 5월 19일). 광량포는 압록강에서 약 400리(약 157㎞) 거리, 한강 해구에 있는 강화도까지 약 600리(약 236㎞)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이북과 이남의 해로를 따라 곧장 강화도로 연결되었다.

조선 중종 때 왜선 세 척이 광량포에 출몰하였으나, 이를 방어할 만한 수군진성이 축성되어 있지 않았다(『중종실록』 18년 6월 17일). 그리하여 1554년(명종 9)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이 노강·선사포·광량을 아울러 이르는 삼포(三浦)에 수군진성을 축조하자고 제안하였다(『명종실록』 9년 10월 22일). 이로 보건대 광량진은 1554년~1597년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15세기 삼포에 주둔한 수군은 약 2,683명으로 추산된다(『성종실록』 10년 12월 25일). 광량진의 기능은 조선시대 일반 수군진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된 광량진 관련 기사 가운데 조선 선조 때 세금 수납 기능이 주목된다. 광량진은 대동강 해구에 입지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의 세금을 동시에 수납할 수 있었다. 또 입지 조건이 배를 정박하기에 편리하여 해운과 하역 작업이 용이하였다. 이런 까닭에 북한의 양곡선이 광량진에 와서 하역을 하면, 남한의 공사(公私) 선박이 선적해서 곧바로 강화부로 운반하였다(『선조실록』 30년 6월 13일).

변천

조선전기의 광량포는 왜구 방어보다 내륙에 있는 평안남도 안주성을 방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조선 인조 때 총융사이서(李曙)가 삼포에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바다를 방비하는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인조실록』 8년 8월 3일). 또 평안감사민성징(閔聖徵)의 요청으로, 황해도의 소나무를 베어다가 전선과 병선을 만들어 광량진에 보급하였다(『인조실록』 8년 12월 24일). 조선 숙종 때 지중추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광량진에 주민들을 안집하도록 하는 한편, 궁가와 아문으로부터 전답(田畓)·염분(鹽盆)·어전(漁箭) 등을 획급하여 방어망을 강화하였다(『숙종실록』 33년 12월 27일). 이후 광량진은 고종 때까지 수군첨사가 주둔하였다(『고종실록』 5년 3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