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율(郭𧺝)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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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곽율 |
한글표제 | 곽율 |
한자표제 | 郭𧺝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사회운동가/의병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태정(泰靜) |
호 | 예곡(禮谷)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1년(중종26) |
사망 | 1593년(선조26) |
본관 | 현풍(玄風) |
주거지 | 경상도 현풍(玄風) |
묘소소재지 | 경상도 고령(高靈) 용담(龍潭) |
부 | 곽지인(郭之仁) |
형제 | (형)곽익(郭𧾰), 곽숙(郭𧽷) (동생)곽장(郭𧽣) |
처_장인 | 정씨(鄭氏): 정사성(鄭思誠)의 딸→(자녀)1남 1녀 |
자녀 | (1자)곽영희(郭永禧) (1녀)이후경(李厚慶)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곽율(郭𧺝) |
총론
[1531(중종26)~1593(선조26) = 63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상도 의병장(義兵將).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인데, 곽지인(郭之仁)의 아들이고 승지정사성(鄭思誠)의 사위이다. 남명(南冥)조식(曺植)과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나이 28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으로 조지서(造紙署)별제(別提)가 되었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김천찰방(金泉察訪)으로 나갔다가, 1580년(선조13) 내섬시(內贍寺)직장(直長)으로 승진하였다.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을 거쳐서, 1586년(선조19)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다고 하여 홍산현감(鴻山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때 향교를 새로 중수하여 매월 초하루 이곳에서 생도들을 데리고 강론하였고, 고을을 순시하면서 농사짓는 일을 권장하였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이성중(李誠中)과 어사(御使)유대진(兪大進)이 서로 잇달아 그를 표창하도록 상소하니, 선조가 특별히 표리(表裡) 1벌을 하사하였다. 1586년(선조19)에 군자감(軍資監)판관(判官)으로 승진하였고, 그해 가을에 예천군수(醴泉郡守)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선조25) 그는 작은 사건에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나서 낙향(落鄕)하여 현풍에 머물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초계 지역 방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구(倭寇)가 갑자기 침입하자, 고령(高靈)에 사는 전 좌랑(佐郞)김면(金沔)과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掌令)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곽율(郭*)은 현풍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요충지 초계(草溪)를 지키니, 왜적이 감히 낙동강 우변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초계는 낙동강가의 요충(要衝)으로 낙동강의 동서 지역을 왕래할 때 반드시 이곳을 경유해야 하므로, 그가 현풍 의병을 거느리고 초계의 길목을 철통같이 지켰기 때문에 왜적이 감히 경상우도 지역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곽율을 초계군수(草溪郡守)의 직무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였는데, 당시 초계군수정눌(鄭訥)이 도망쳐서 군수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임시군수[假守]에 임명된 곽율은 작전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 다음에 장정(壯丁)들을 훈련시키고 기계(器械)를 수리하는 등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북상하는 왜적과 여러 번 접전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왜적의 숫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그를 예빈시(禮賓寺)부정(副正)에 임명하였으나, 도내(道內)의 유생(儒生)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여 그대로 유임되었다. 경상도순찰사 김성일은 “만약 여러 고을로 하여금 모두 초계군에서 정성을 다해 싸우는 곽율처럼 한다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당시 전쟁의 재화(災禍)를 당하여 굶어죽은 송장이 들판에 가득하고, 굶주려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초계로 모여들었는데, 곽율은 달마다 그 숫자를 헤아려서 밥을 주고 죽을 주어 그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 중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동생이 전염병을 걸렸는데, 그가 직접 약을 달여서 동생을 먹이다가 그도 전염병에 전염되어, 1593년(선조26) 4월 팔계(八溪)의 관사(館舍)에서 객사하였는데, 향년 63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의지와 기상이 특이하고 풍채(風采)가 범상치 않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으나, 가까이에서 보면 겸손하고 성실하였다. 나물 반찬 한 가지라도 맛있게 먹었고, 화려한 옷 입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곤경에 처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굳은 절개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가 공무를 집행할 적에는 일에 임하여 명석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다. 마음을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가졌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일을 세밀하게 처리하기에 힘썼다. 정성을 다하여 공무(公務)를 받들었으나, 오직 관용으로써 사람들을 다스렸으므로, 전후에 관직을 역임하면서 모두 훌륭한 성과가 있었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상도 고령 용담(龍潭)의 산록에 있는데, 이후경(李厚慶)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경상도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순암집(順菴集)』
- 『학봉속집(鶴峯續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