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전(公須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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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청이나 역의 운영에 필요한 각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정한 전지.

개설

고려말 전제개혁(田制改革)에서는 공수전을 지방관의 관품(官品)에 따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차등 있게 설정하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지방관청의 등급과 관계없이 대로·중로·소로의 3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수전의 지급 기준뿐만 아니라 지급 액수도 축소·조정되었다. 해당 지방관청에서 직접 공수전세(公須田稅)를 수취하였으며, 중앙정부의 일정한 통제 아래 지방관[外官]이 공수전세의 출납 운영을 책임졌다. 공수전세는 공무로 지방을 왕래하는 사객(使客)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거나 지방관의 업무 수행비와 지방관청의 운영비로 많이 지출되었다.

내용

고려시대의 공수전은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와 지방관의 녹봉을 위한 재원으로, 해당 주·부(府)·군(郡)·현(縣)·역(驛)에 거주하는 성인 남자[丁]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 있게 절급되었다. 조선건국 이후에도 지방관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부·목(牧)·도호부(都護府)·군·현·역 등에 공수전이 각각 지급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추진하였던 전제개혁에서는 지방관의 관품에 따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차등 있게 설정되었다.

그러다가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에서는 공수전의 절급 기준으로 지방관의 관품 외에 도로의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의 3등급으로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이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대로(大路)의 유수부(留守府)·대도호부·목-중로(中路)의 유수부·대도호부·목, 대로의 도호부·지관(知官)-중로의 도호부·지관, 대로의 현관(縣官)-소로(小路)의 도호부·지관, 중로의 현관-소로의 현관으로 구분하는 지급 체계가 정비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러한 방식은 결국『경국대전』상에 지방관청의 등급과 관계없이 대로·중로·소로 3등급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수전의 지급 기준뿐만 아니라 지급 액수도 축소·조정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지방관청의 등급과 관계없이 부·대도호부·목뿐만 아니라 도호부·군·현에도 하나같이 15결을 지급하되, 주요 교통로[沿路]의 대로·중로에 각각 10·5결씩을 더 지급하였다. 반면에 역(驛)의 경우 대로·중로·소로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각각 20·15·5결을 지급하되, 황해도와 평안도·함경도의 대로역에는 각각 25·10결씩을 더 지급하였다. 그리고 평안도·함경도의 중로역과 소로역에는 각각 7·3결을 더 지급하였다. 이처럼 공수전의 지급 기준뿐만 아니라 지급 액수도 축소·조정되었다.

공수전은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수세지(收稅地)로, 해당 지방관청에서 직접 전세를 수취하였다. 그렇지만 전세 부과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답험손실(踏驗損實)은 다른 명목의 전지(田地)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파견된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에 의해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수취된 공수전세는 국가 재정을 위한 국고(國庫)의 전세와 구분하여 사고(私庫)라 불리는 창고에 따로 보관되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일정한 통제 아래 지방관이 공수전세의 출납 운영을 책임졌다.

공수전세는 공무로 지방을 왕래하는 사객(使客)의 접대 비용에 충당[支應]하거나 지방관의 종인(從人)과 말의 식량 및 사료[糧料]로도 많이 지출되었다. 또한 중앙에 상납해야 할 공물이 부족할 경우 공수전세로 보충[補添]하였으며, 지방관청 건물의 수리나 관청에 필요한 온갖 종류의 집기[什物]와 관청 살림에 필요한 각가지 그릇[器皿] 등을 위한 비용으로도 지출되었다. 그 밖에 지방 향교의 제사[釋奠] 비용과 교수(敎授)·훈도(訓導)들의 급료[廩俸]로 지출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관의 사사로운 손님 접대나 상장(喪葬) 부조, 혹은 청탁을 위한 뇌물로도 많이 지출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장우,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 일조각, 1998.
  • 안병우, 「고려 말·조선 초의 공해전: 재정의 구조·운영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5,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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