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貢生)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에 지방의 교생 중에서 중앙 경아전의 서리에 충원되는 자.

개설

공생은 세공생도(歲貢生徒)의 준말이다. 『경국대전』에서는 각사(各司)의 서리(書吏)를 여러 고을의 교생(校生) 중에서 나이가 지긋하고 재주가 소략한 자로 보충한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공생은 지방의 교생 중에서 중앙 경아전(京衙前)의 서리에 충원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담당 직무

공생은 서리였다. 이들은 조선시대 각사에 소속된 하급 관리인 경아전으로, 각사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즉, 문서의 기록 및 수발(受發)을 담당하였다. 조선초 경아전에서 상급은 녹사(錄事), 하급은 서리로 구분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배속된 관아의 특성에 맞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예컨대 사정(司正)과 형사(刑事)의 업무를 관장하였던 관아인 사헌부·의금부·형조(刑曹)·한성부 등에 소속된 서리는 각종 범죄를 예방하는 일, 각종 금령을 위반한 자를 체포하는 일, 각종 범죄 행위를 수사하고 그 관련자를 체포·압송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변천

성종대에는 영안도(永安道: 현 함경도)와 제주 3개 고을의 공생을 허락하지 말라는 요청이 있었다(『성종실록』 5년 10월 28일). 사헌부 대사헌이서장(李恕長) 등은 상소를 통하여 변방에 해당하는 양계(兩界: 현 강원도 일부 지역과 함경도·평안도 지역)와 제주도 3개 고을의 경우 공생을 차출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서울과 거리가 멀어 왕복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생을 양성하는 것은 경전을 밝히고 행실을 닦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비하려는 것인데 서리를 지방 교생 중에 취하는 것은 그 도리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더욱이 영안도와 제주에서는 자제들의 입사(入仕)할 길을 열어 두어서 직(職)을 받고 녹(祿)을 받도록 스스로 과(科)를 두었으니 원방의 사람들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세공(歲貢)과 서리를 징용한다면 원망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서 세공생도를 면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같은 시기에 이조(吏曹)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이 변진(邊鎭)을 지키는 일과 북경에 가는 행차를 맞이하고 보내는 일로 매우 힘들어하니 그 노고가 풀릴 때까지 공생을 면제하자는 건의를 하였다(『성종실록』 6년 2월 14일). 이어서 이조에서 세공생도에 관한 『경국대전』의 규정을 함부로 바꾸기는 어려우나, 향교의 교생이 정수에 차지 못하는 경우 공생은 부역이 없는 평민 중에서 글과 산법을 아는 자로서 충당하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이는 다른 도에도 확대 적용하는 것으로 수용되었다(『성종실록』 6년 4월 25일).

그러나 성종대에 예조(禮曹)와 사역원에서 몽고학·왜학·여진학을 발전시킬 조건을 논의하면서 공생의 징용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즉, 각 도에서 8명씩 어리고 총민한 자를 선발하여 서울로 보내면 이들을 몽고학·왜학·여진학을 익힐 세공생도로 삼고, 만약 마음을 써서 선발하지 않은 수령은 중죄로 논하자고 건의하였다. 아울러 호내(戶內)에 인정(人丁) 2명, 인정이 없는 자에게는 호별로 1명의 봉족(奉足)을 주고 생도(生徒)에게는 반점심(半點心)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성종대에는 식년(式年)마다 몽고학 5명과 왜학·여진학 각각 6명을 지방에서 선발하여 보내게 하였다(『성종실록』 9년 11월 21일).

참고문헌

  • 이훈상, 『조선 후기의 향리』, 일조각,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