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제(雇立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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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고립제 |
한글표제 | 고립제 |
한자표제 | 雇立制 |
동의어 | 급가고립(給價雇立), 고역(雇役), 고용(雇用) |
관련어 | 모립(募立), 납포제(納布制), 대동법(大同法) |
분야 | 경제/재정/역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윤용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고립제(雇立制) |
관의 역사를 수행하기 위해 급료를 주어 고용하는 제도.
개설
16세기 이후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신역제(身役制)의 원칙이 무너지면서 납포제(納布制)가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군역을 대신하는 군포(軍布)를 납부하거나, 장인(匠人)의 신역을 대신하여 장인가포(匠人價布)를 납부하는 일 등이 그러하였다. 신역의 부역노동을 징발하는 체계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대신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가 마련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현물세를 더 거두고, 이를 재원으로 하여 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고용하는 방식, 즉 급가고립(給價雇立)하는 고립제가 등장하였다.
고립제는 신역의 분야에서 먼저 시행되었으며, 이어서 부역노동의 다른 형태인 요역(徭役), 곧 민호를 대상으로 한 부정기적인 노동력 징발 체계에서도 적용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점차 요역의 노동력 징발을 대신하여 고용노동의 노동력을 모집해서 구매하는 모립제(募立制)를 적용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7세기 이후 고립제가 성립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부역제도의 비효율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역노동의 담당자들은 자신의 거주지에서 상당히 떨어진 근무처까지 이동해야 했다. 이는 왕래에 따른 큰 부담을 초래했다. 부역노동은 때를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부역노동 담당자의 대부분인 농민들은 농번기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곤란하였다. 더욱이 기근·전염병 등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더 큰 어려움이 따랐다. 농업을 권장하고 더 많은 현물세를 징수하려는 정부의 입장이나 더 많은 소출을 기대하는 생산자 농민의 입장에서도 부역노동의 현물세화는 바람직한 시대적 요구에 속하였다.
두 번째 조건은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농민층의 계층 분화 현상이 뚜렷해진 데 있다. 몰락농민층은 도회지나 농촌에서 임금노동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는 교외에 빈민층 거주지가 형성되어, 임노동자층이 형성됨으로써 고립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마련된 것이다.
내용 및 변천
신역에서의 고립제는 17세기 초엽부터 널리 시행되었다. 경아전(京衙前) 중 서반아전(西班衙前)에 속하는 조예(皂隸)·나장(羅將)의 경우, 16세기부터 부역제도 운영의 비효율성이 드러나면서 입역(立役) 조건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조예·나장의 적극적인 피역 저항을 초래했다. 그 결과 대립(代立) 현상이 보편화되었다. 16세기 후반의 서울에는 대립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일정한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조예·나장의 역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립의 행위는 처음 관부의 관여 없이 이루어졌지만, 점차 관부가 개입하게 되었고, 나아가 관부에서 직접 대립가(代立價)를 결정하는 등 대립제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조예·나장의 대립제는 관부가 주도하는 납포제와 고립제로 전환되었다.
조예·나장의 고립제는 1623년(인조 1) 부역 의무자가 도망함으로써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경기·충청·황해의 4도에서 경작지 1결당 쌀 3되[升]씩 거두어 조예·나장의 고립가에 충당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637년(인조 15)에는 조예·나장의 수를 줄였으며, 4도에서 쌀을 거두지 않는 대신 호조에서 고립가(雇立價)를 지불하게 되었다.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조예·나장의 고립가는 대동세의 지출 항목 속에 포함되었다. 대동세를 거두는 것으로 부역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부역노동의 일부 종목이 고립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이루었다.
17세기 이후 호역(戶役)·결역(結役)의 형식으로 징수되는 군현의 잡역세(雜役稅)는 관수(官需)의 각종 잡물을 마련하는 데 쓰였으나, 한편으로는 각종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달하는 데에도 쓰였다. 잡역세는 지역에 따라서 역가조(役價租)·고마조(雇馬租)·고가미(雇價米)·식견조(息肩租)·입마전(立馬錢)·담군전(擔軍錢) 등으로 불리었다. 토목공사라든지 영접·지대의 요역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은 특히 이 같은 종류의 잡역세였다. 이러한 잡역세 중에는 특정한 역사가 있을 때 쓰도록 지정한 것도 있었다. 요컨대 대동세 유치미(留置米)의 용도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방 관부의 일상적 잡물을 구매하는 경비였다. 아울러 대소의 각종 역사, 예를 들면 축성, 관청 건물의 수리, 제방 축조 등 각종 공역의 경비와, 왕, 사신, 중앙 및 지방 관리 등의 왕래에 따르는 각종 역사의 경비를 마련하는 데에 이 같은 잡역세 수입이 쓰일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잡역세는 그전 시기에 지방적 특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운영되던 요역 종목의 상당 부분이 물납세화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요역의 분야에서 고립제가 성립·확산될 수 있었다.
의의
고립제의 성립은 부역노동의 담당자인 농민들이 국가권력의 인신적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뜻한다. 종전에 부역노동에 의해 수행되던 각종 역사가 고립의 방식으로 고용된 노동력에 의해 수행됨으로써, 이 같은 분야에 전문으로 종사하는 새로운 직업인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부역제도의 변화는 조선후기 사회경제구조의 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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