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회(姜文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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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3년(세종15)~1499년(연산군5) = 67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우인(友仁),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단양(丹陽)이었다. 단양에 그의 토지와 별장이 있어서 은거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대대로 단양에 거주하였다. 혜평공(惠平公)강현(姜顯)의 아버지다.

성종 시대 활동

1469년(예종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추천하는 자가 없어서 고향 진주(晉州)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476년(성종7)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유지(柳輊)가 그 지방에서 훈도(訓導)의 공이 많은 사람들을 천거하기를, “전 교수(敎授)주백손(朱伯孫)·강문회, 전 군수김극검(金克儉) 등은 모두 사표(師表)가 될 만하니, 서용(敍用)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조(吏曹)에서 계본(啓本)에 따라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하니 그는 태학생(太學生)들을 가르쳤다.

연산군 시대 은거 생활

1494년 성종(成宗)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였는데, 강문회는 연산군의 정사(政事)가 문란함을 보고 관계에 진출할 뜻이 없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는 고향 경상도 진주 대신에 외가가 있는 충청도 단양에 정착하였다. 단양의 풍광(風光)을 즐기며 『소요당기(逍遙堂記)』를 지어서 자기 뜻을 나타냈고, 서적(書籍)을 탐독하며 후생을 가르쳤다. 배우려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어득강(魚得江), 김수경(金守敬), 이적(李迪) 등이 그 문하(門下)에서 배출한 사람들이다. 1499년(연산군5) 5월에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묘소와 성품

묘소는 충청도 단양(丹陽) 북동(北洞)의 산록에 있는데, 150여 년이 지나서 조계원(趙啓遠)이 지은 묘표(墓表)를 세웠다. 그는 천품이 순후하고 도량이 높고 단정하였으며, 뜻과 행동이 정직하여 거짓이 없었고, 시(詩)와 문장(文章)이 간결하고 예스러워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뇌계집(㵢谿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