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
목차
개요
고구려의 제9대 국왕. 휘는 남무(男武). 태조대왕, 차대왕과의 관계가 미스테리한 신대왕의 장남이다. 장수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아 18년간 재위했다. '천왕'으로 끝나서 오해할 수 있는데, 천왕(天王)이 아니라 고국천원(故國川原) 근교에 묻어서 고국川왕이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판단력이 좋고 힘이 아주 세서 큰 솥도 들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 솥을 드는 사람을 장사로 여겼다. 체격도 커서 키가 무려 9척이었다고 하는데 왕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넣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당시의 고구려 남성보다 훨씬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체격이 8척이 넘어가는 다른 왕은 백제의 제25대 무령왕과 신라의 진평왕이 있다.]
시호가 비슷한 고국원왕과는 대조되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왕위 다툼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천왕의 형 발기(拔奇)가 재능이 용렬하다(불초하는)는 이유로 발기 대신 동생인 이이모(伊夷謨)[* 《삼국사기》 원문에 '이이모'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음. (伯固薨, 國人以長子拔竒不肖, 共立伊夷謨爲王.)]가 국인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발기는 이이모를 원망하여 연노부(소노부)의 장과 함께 각각 30,000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 공손강에게 항복했다가 나중에 비류수 유역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아귀가 안맞는 부분이 여럿 생기게 된다. 공손강이 요동을 확보한 것은 산상왕 시기인 204년의 일로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고국천왕 대라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잘리고 고생하던 시기로 요동태수가 되기 이전이다. 공손도의 요동태수 임명 시기는 다른데, 《삼국지》는 189년, 《후한서》는 184년이다. 이중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고국천왕의 즉위 이후 시점인 것이 문제이다. 고발기를 도운 인물이 공손강이 맞다면 이는 이 시기 요동 지역에 존재하였던 동명이인이자 병력만 30,000명이 넘는 유력자인 공손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시기 요동 공손씨 정권의 공손강의 경우, 아버지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면직되어 영향력을 잃자 요동군 양평현령 공손소가 공손강을 강제로 끌고가서 하급 관리로 부려먹는 중이었는데, 이후 간신 동탁이 집권하고 공손도가 복권되어 요동태수가 되자 공손강이 공손소를 체포해 저잣거리에서 때려죽였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공손강이 고생하던 시기의 요동태수로 유력한 인물은 장거와 장순의 반란시에 죽은 양종이다. 동명이인설을 주장해도 당시 요동에 딱히 공손씨 군벌이 있었던 흔적이 없는데 평범한 어느 공손강이 과연 30,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원해줄 수 있었는지도 문제이다.
《삼국사기》의 고국천왕 즉위년 왕위 계승 분쟁 기사는 《삼국사기》 내의 다른 기록과도 충돌한다. 176년(신대왕 12년) 정월, 신하들이 고남무의 태자 책봉을 건의하는 기사와 3월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신대왕 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국인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사실 민중왕과 모본왕이라는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모본왕이 어렸기 때문에 추대된 특수 사례다. 따라서 《삼국사기》 고국천왕 즉위년 기사는 오류라고 할 수 있고, 고국천왕의 형 고발기는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발기(發歧)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국천왕의 형 발기와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발기가 동일 인물이라면 비슷한 이야기 구성에 비해 세부 요소에서 동일 인물일 경우 일어날 수 없는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년의 기사를 후대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윤색된 기사로 보면 아귀가 맞는다.[*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년조의 왕위 계승 분쟁에 대한 기사에 윤색이 가해졌다는 건 학계에서도 지적되는 사항이다. 권순홍의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한국고대사학회, 2015)를 참조하라.]
사실 기록이 이렇게 꼬여버린 데에는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고국천왕을 누락시켰고, 이 착오를 《통전》[* 고국천왕 즉위년조의 왕위 계승 분쟁 기사가 《삼국지》보다는 《통전》의 기사와 유사하여 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삼국지》가 아니라 《통전》에서 인용한 기사라고 추정한다.]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 한 몫 한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던 김부식이 《통전》의 기록을 보고 이이모는 백고를 이었기에 고국천왕, 위궁은 백고를 이은 이이모를 이었기에 산상왕일 것이라 여겨 원래는 《삼국지》와 《통전》에서는 산상왕에 대응되던 이이모(伊夷模)를 고국천왕, 동천왕에 대응되던 위궁(位宮)을 산상왕에 각각 대응시킨 후 이이모와 관련된 기사를 고국천왕 즉위년조로 가져와 인용했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고국천왕의 실존문제
그런데 《삼국지》의 기록대로 신대왕 백고의 뒤를 이은 이이모가 산상왕이고, 위궁이 동천왕이라면, 고국천왕의 존재가 누락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쓰다 소키치 같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한 바 있다.
쓰다 소키치의 고국천왕 부존설은 노태돈에 의해서 반박 당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사 연구》에서 고국천왕이 존재하지 않은 군주가 아니었다는 근거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 중국의 역사서에 적힌 우리나라 왕조의 왕계는 누락이나 착오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서긍(徐兢, 1091~1153)의 《고려도경》(高麗圖經) <세차>(世次) 왕씨조(王氏條)에 적힌 고려의 왕계를 《고려사》(高麗史)와 비교해봤을 때, 그 왕계에 착오[* 대표적인 예시로, 고려 제2대 군주인 혜종 왕무(王武)의 동생인 광종 왕소(王昭)를 왕무의 아들이라 기술하고, 제3대 군주인 정종 왕요(王堯)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을 들 수 있다.]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 또한 그랬을 것이란 얘기다.
대표적인 예시로 그는 고구려 신대왕의 재위기간을 들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신대왕이 순제(順帝, 재위 125~144)와 환제(桓帝, 재위 146~168) 연간에 요동군을 자주 침공했다고 하고, 요동에 자리잡은 공손탁을 도와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후한서》에서는 신대왕 백고의 즉위기사에 뒤이어 순제 양가(陽嘉, 132~135) 원년에 현도군 둔전(屯田) 6부(六部)를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따르면, 신대왕은 늦어도 125년 혹은 132년 이전에 즉위했으며, 공손탁의 요동태수 취임 시기인 189년 이후에 사망한 것이 된다.
그리고 고발기가 망명한 시기의 태수는 공손강이었는데, 공손강은 204년에 요동태수가 되었으므로 신대왕은 204년 이후에 사망한 것이 되어 재위기간이 70년을 넘게 된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며 《후한서》 <교현전>(橋玄傳)을 인용해 그 기록에서 암시된 신대왕의 즉위년이 《삼국사기》의 즉위년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환제 말에 선비(鮮卑), 남흉노(南匈奴) 및 고구려 사자(嗣子) 백고가 반하여 침구하자, 사부(四府)[* 중국 후한 때의 네 관아로, 태부(太溥), 대위(大尉), 사도(司徒), 사공(司空)을 이른다.]에서 교현을 천거하여, 탁요장군(度遼將軍)[* 전한의 관직으로,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으로 임명하고 황월(黃鉞)[* 금으로 장식한 도끼. 천자(天子)가 정벌을 할 때 쓰는 상징적 도구이다.]을 주었다. 현이 진(鎭, 진영)에 이르러 병사를 휴양한 뒤,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호로(胡虜)와 백고 등을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재직 3년에 변경이 안정되었다. 영제 초에 하남윤(河南尹)[* 후한 때 도읍이 있었던 하남군(河南郡, 지금의 낙양 부근)을 관리하던 직책.]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소부(少府)[* 고대 중국의 관직. 진나라 때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산·바다·연못 등의 세금과 천자의 경비(經費)·궁중 잡무를 관리하였다.], 대홍려(大鴻臚)[* 한 무제(기원전 156~기원전 87,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에 설치된 고대 중국의 관직으로, 진(秦)나라 때 귀순한 이민족의 관리를 맡은 직책인 전객(典客)을 기원으로 한다. 제후와 귀순한 주변 이민족을 관리하였다. 《고구려사 연구》에는 '대홍로'로 오기되어 있음.]로 전임되었다. 건녕(建寧) 3년(170)에 사공(司空)[* 고대 중국의 관직. 감옥에 갇힌 죄수의 관리 및 치수(治水), 각종 토목공사를 맡았다.]이 되었다가 사도(司徒)[* 고대 중국의 관직. 전토(田土)의 관리·재화·교육 등을 맡았다.]로 전임되었다. >---- >《후한서》 권51 <교현전>(橋玄傳) 中. 《고구려사 연구》에서 재인용. 영제 원년은 168년이다. 교현은 그 이전 3년간 탁요장군으로 재직했으므로, 아무리 빨라도 165년 이후에 탁요장군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嗣子)는 ‘대를 이을 아들’이란 뜻이다. 이 표현은 신대왕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거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신대왕 즉위년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인용문에서 탁요장군으로 3년간 재직했다는 부분까지의 기록은 채옹이 쓴 교현을 기리는 글 <황월명>(黃鉞銘)에도 있다고 한다.
노태돈은 고구려인들이 기년을 조작하려면 훨씬 접근성이 좋은 <동이열전>이나 《삼국지》 <오환 선비 동이전>의 기사를 취했으면 취했지, 굳이 <교현전>이나 채옹의 <황월명>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고구려 신대왕의 즉위년을 <교현전>을 참고하여 조작했다면 차대왕과 신대왕을 부자관계로 기록한 《후한서》의 기록과 달리 그들을 형제관계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며, 《삼국사기》의 기록이 중국 측 사서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독자적인 전승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지》의 기록이 착오가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중국 측의 고국천왕 누락을 고국천왕이 실존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고구려의 집안(集安) 천도가 산상왕 때 이루어졌음[* 현재 통설은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이 집안 지역이라는 설이지만,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집안 지역 산상왕 천도설이 제기된 바 있었다. 이 학설은 《삼국사기》의 유리명왕 대의 천도 기록을 부정하려는 의도로 제기된 학설이라 사장되었다가, 노태돈이 1999년에 공저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문화》에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28)조의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는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의 발언을 인용하여 위나암성의 묘사가 집안의 산성자산성보다는 환인의 오녀산성과 비슷함을 지적하고, 유리명왕 22년(3)에 천도한 국내성이 집안지역이 아니라 환인 지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재조명되어 다시 유력한 학설로 부상하고 있다. 단, 노태돈의 집안 지역 산상왕 천도설에서는 일제강점기 학자들의 학설과는 달리 《삼국사기》의 유리명왕 대의 천도 기록을 긍정한다.]을 근거로, 환인(桓仁)에서 죽은 고국천왕의 왕호가 어떻게 ‘고’국천왕이 될 수 있냐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설이 있으나, 이는 산상왕이 천도할 때 고국천왕의 시신을 환도성으로 운구해갔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학설이란 것이다. 노태돈은 먼저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한 대목에 있는 고구려인들이 ‘100일 동안 상을 치렀다(停喪百日)’는 구절[* “그 장례에 곽은 있으나 관은 없고, 100일이 되는 날에 상을 끝낸다. (其死葬有槨無棺, 停喪百日.)”]을 인용하고, 이 구절을 《삼국지》 <동이전> 왜조의 ‘처음 사람이 죽으면 상을 10여 일을 치르며,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가 곡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가무, 음주를 한다. 장례를 마치면 온 식구가 물속으로 들어가 목욕하니 이는 중국의 연목과 같다. (始死停喪十餘日, 當時不食肉, 喪主哭泣, 他人就歌舞飮酒. 已葬, 擧家詣水中澡浴, 以如練沐.)’라는 대목과 비교하여 고구려인들이 행했다는 ‘停喪百日’을 장례를 끝내는 기간으로 해석했다.
뒤이어 노태돈은 고구려의 왕실은 민간과는 달리 왕릉을 축조하는 기간이 있어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았을 것이며, 장례는 일정 기간 후 후임자인 새로운 왕의 주도하에 치러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산상왕이 왕위계승 분쟁 당시 고국천왕의 시신을 확보했을 것이고, 집안으로 천도할 때 고국천왕의 시신을 새 도읍지로 운구하여 그곳에서 장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렇게 검토를 마친 노태돈은, 마지막으로 《삼국지》의 단속적인 접촉을 통해 파악된 왕계보다는 고구려 내부에서 스스로 정리해 《삼국사기》에까지 전해진 왕계가 더 사실성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업적
국방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이겨낸 것을 넘어 큰 업적을 몇 가지 남겼다. 우선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유입된 한족 유민들을 받아들였다. 후한의 요동 태수가 침략해오자 동생[* 《삼국사기》 원문에는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王遣王子罽須拒之 不克)] 고계수(신대왕의 4번째 아들)[* 《삼국사기》에 신대왕의 첫째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형으로 기록된 발기(拔奇)는 사실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년 조에 등장하는 고국천왕의 동생이자 산상왕과 계수의 형인 발기(發歧)와 동일 인물인데 김부식이 《통전》의 기록을 옮겨와 건안 연간(196~219)에 있었던 이이모의 왕위 계승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고국천왕 즉위년 조에다 인용해 두 명의 발기가 따로 존재했던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막지 못했는데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친정해 좌원(坐原) 전투에서 무찔렀다. 왕후 쪽의 외척 연나부의 좌가려와 어비류가 자신들의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재하려 했는데 반란을 일으켜 버리자 이를 진압하고 그들을 제거했다.
인재 등용 및 진대법(賑貸法)
> 사사로운 친분관계로 관직이 주어지고, 덕이나 능력으로 관직에 나설 수 없으니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된다.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탓이니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라. >---- >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며
안류는 귀족들이 천거한 인물이었는데 안류가 또 다시 을파소를 천거했다. 194년 10월에는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갔다가 만난 어떤 백성이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흉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옷과 식량을 준 후 진대법을 실시하여 하호(下戶)[* 평민이나 서민의 고구려식 (한자화된) 표현.]들을 구제했다. 진대법은 구휼책으로 춘궁기(음력 3월부터 7월까지)에 국고에 있는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음력 10월)에 낮은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제도였다. 현대로 따지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은행 또는 정부의 저금리 대출과 비슷하다. 진대법은 복지의 성격이 더욱 강하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짙게 반영된 정책이었다.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굶어죽는걸 피하려고 직접 자청해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면 귀족의 힘이 강해지지만 정부가 빌려주면 굳이 귀족 밑에 안 들어가도 되기 때문에 귀족의 힘이 강해지는걸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도 서술하듯 이 때는 국가 공민(公民)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입장에서는 국가 통제 아래 역을 지고 조세를 납부할 공민이 필요했다. 부족 연맹체에서 하호나 호민으로서 귀족 아래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귀족의 세력은 커진다. 진대법을 실시하여 굶주린 백성이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복지 이전에 국왕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다. 흔히 진대법이 을파소의 건의에 의해 실시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의 진대법 관련 기록에는 진대법은 고국천왕이 백성의 하소연을 듣고 왕이 직접 실시한 법이라고 나와 있다. 을파소가 국상의 지위에 있었으니 진대법의 실시에 어느 정도 관여하기는 했겠지만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부자 세습제 확립
고국천왕의 치세에 왕위의 부자간 상속제가 확립되었다. 교과 과정에서는 고국천왕 대에 형제 상속제에서 부자 상속제로 변경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형제 상속제라는 제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불투명해 논란이 있다. 고국천왕 이전의 왕들 중에 왕제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이것을 약한 왕권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으로 봐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고국천왕 이전에도 부자 상속제가 기본이었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이었으므로 형제 상속제가 부자 상속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정작 고국천왕은 왕후 우씨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신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이 뒤를 이었다. 즉 형제 상속이 이어진 것이다. 고국천왕 때 부자 상속이 확립됐다면서 정작 그가 죽고 바로 형제 상속이 된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부자 상속은 동천왕 때에 와서야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고국천왕 때 부자 상속이 확립됐다는 주장은 잘못됐으며 산상왕-동천왕 시기에 부자 상속이 확립됐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부족 5부 체제의 5방위 개편
계루부, 연노부, 소노부, 절노부 등 부명이 중부 /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등의 방위명으로 전환되는 등 중앙 집권화를 위해 정치 체제가 더욱 정교해젔다. 이런 5방위 체제는 역사가 깊은데 부여, 백제, 발해에도 5부가 있었다. 5부를 방위명으로 개편했다는 직접적 기록이 있는 건 아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2년조에서 왕후 우씨의 출신지를 연나부로 기록하고 있는 점, 고국천왕 13년 4월 조에 4부에 국상으로 추천받은 안류의 출신지가 동부(東部)로 기록되어 있는 점, 이후 <고구려본기>에서 인물의 출신을 설명할 때 기존 명칭이 아닌 방위명 부로 기록하고 있는 점을 토대로 고구려의 기존 5부가 방위명 부로 개편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왕후 우씨
왕후 우씨와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산상왕 승하 후 동천왕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우씨도 세상을 떠났다. 우씨는 죽기 직전에 '차마 고국천왕을 볼 낯이 없으므로 산상왕 곁에 장사지내 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동천왕은 그 유언을 따랐다. 얼마 후 무당이 찾아와 동천왕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꿈에서 고국천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길 수 없어 결국 함께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 《삼국사기》 동천왕 8년 가을 9월
동천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고국천왕의 무덤 주변에 일곱 겹의 소나무를 심어 왕의 능을 꼭꼭 가리게 했다고 한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우씨의 이야기는 오늘날 봐도 꽤 재밌는 드라마 소재가 될 법한 이야기다.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고국천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고국천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우씨를 왕후로 삼다 二年秋九月 시조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春三月 붉은 기운이 태미를 통과하다 四年秋七月 혜성이 태미에 나타나다 六年 왕이 후한 요동 태수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다 八年夏四月 화성이 심성을 지키다 八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二年秋九月 좌가려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十三年夏四月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다 十三年冬十月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다 十六年秋七月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冬十月 진대법을 실시하다 十九年 중국에서 난리를 피하여 많은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九年夏五月 고국천왕이 붕어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