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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6일 (화) 11:08 판
서응시(徐應時 임진왜란 의병장)
장성서씨(이천서씨 절효공파로도 표기되고 있음)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증산 서원에서 향사되고 있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달성. 자는 군망(君望)·계성(啓聖), 호는 창계(昌溪). 시호는 충렬. 칠백의사 중의 한 사람이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활동 사항
서응시(徐應時)[?~1592]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92년 8월 금산에 침입한 적을 만나 분전하다가 칠백 의병과 함께 순절하였다.
묘소
묘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칠백의총이다.
상훈과 추모
창원시 마산회원구 원계리 증산 서원(甑山書院)에서 향사되고 있다.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창건된 증산서원(甑山書院)은 충열공 창계 서응시(忠烈公 昌溪 徐應時 ; 1531)을 배향하는 곳으로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복원하여 대지 200평에 건평 60평으로 세운 목조와가(木造瓦家)로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강당이 파손되자 그해 11월에 복원하였다. 강당은 4칸, 별묘 3칸, 고사 3칸으로 구성하였고 매년 음력 삼월 초팔일에 유림들과 함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다.
창계 서응시(昌溪 徐應時公)의 스승은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상소했으나 조정 신료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이때 공이 참모역할을 하다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를 하여 사적 제105호인 칠백의총에 안치 되었다.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무학산(舞鶴山)이 우뚝 솟아 천수에 푸르러고 광려천(匡廬川)이 출렁출렁 만세(萬世)토록 맑구나. 생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서릿발 같은 절의(節義)는 완연히 만고(萬古)의 달빛처럼 맑구나. 상서(祥瑞)로운 빛과 구름서리고 아름다운 기운이 엉킨 버들엔 내낀 천가의 새벽이요. 꽃바람 부는 온천하의 봄이로구나. 이 땅에 산이 푸르고 물 맑은 내서의 원계리(元溪里)가 있으니, 달성 서씨(達成徐氏) 현감공파(縣監公派) 후손이 죽음으로 의(義)를 지킨 창계공(昌溪公) 서응시(徐應時)가 대대로 세거(世居)해온 땅이다.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 휘 서진(奉翊大夫 版圖判書 達成君 諱 徐晋)이 시조이며, 서침 구계선생(龜溪先生)이 5대손(5代孫)이다. 창계공은 1531년(중종 신묘)에 태어나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의 문인으로 율곡선생의 이론을 따랐으며, 스승이 귀양을 갈 때 의자를 메고 조선생의 뒤를 따르는 등 10년을 하루 같이 모셨다. 선조 24년(1591)에 왜국사신(倭國使臣)인 승려 현소(玄蘇)와 유천(柳川) 등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조중봉선생이 도끼를 들고 궁전 앞에 엎드려서 임금에게 왜구사신 처단을 상소하고 왜국군(倭國軍)이 침략할 것이니 그들의 침범에 대비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묵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사상미증유(史上未曾有)의 칠치난(漆齒亂)이 돌발하여 섬오랑케 2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근역 호산을 짓밟으니 조국은 시체의 산과 피의 내를 이루었다. 이때 조중봉선생은 분(憤)을 참지 못하여 창의(倡義)하니 창계공은 스승을 따라 나서 기허대사군과 합세하여 적을 쳐서 청주를 수복(收復)하는공을 세웠다. 임진년 8월 18일에 이르러 왜적 고바야가와다까가게의 대군을 금산 경양대(錦山 景陽臺) 아래에서 만나 분전(奮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適)으로 모든 의사(義士)들이 조선생을 따라서 북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하늘을 가리키고 땅에 그리면서 나라와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충의정신으로 700의사(義士)가 목숨을 던지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라는 무덤은 사적 제105호로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조중봉선생과 기허영구대사 휘하(麾下) 칠백의사의 유골봉안 묘소다. 창계공(昌溪公)은 조중봉선생의 참모로 칠백의사 중 한 영령(英靈)이다. 충장공(忠莊公) 유림(柳琳)이 인조16년(1638)에 삼가 순절비(殉節碑)와 종용사(從容祠)를 창건하여 해마다 음력 8월 18일에 칠백의사의 정충의절(貞忠儀節)을 추도(追悼) 찬앙(讚仰)한즉 단말마적(斷末魔的) 일제(日帝)가 최후 발악으로 문득 금산 순의비(殉義碑)와 가야산 해인사 송운비(伽倻山 海印寺 松雲碑)를 파괴하고 말았으나 미구(未久)에 왜적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여 조국광복이 되자 지방관민이 정성과 공경심을 바쳐 순의비와 종용사를 복원건립하니 칠백의총(七百義塚) 위의 달빛과 함께 만고에 길이 멸(滅)하지 않으리라. 숙종13년(肅宗 1687)에 추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시(追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諡)는 충열(忠烈)이라 하였다. 고종3년(1866)에 광려 증봉(匡廬 甑峯)의 북쪽 두산(斗山) 아래 원계(元溪) 위에 재사(齋舍)를 이건하였는데 그때 주손 진우(冑孫 鎭祐)가 정성을 다하였다. 1950년에 6·25동란이 발발하였을 때 재사건물(齋舍建物)이 모두 불타 버렸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랴. 1953년에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공경(恭敬)함을 바쳐 복원중건(復元重建)하였다. 이때 사림의 공의(公議)를 얻어 재사(齋舍)에서 서원(書院)으로 승격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2003년 5월에 갑자기 폭풍우의 재난을 입어 서원강당이 크게 파괴되고 사우(祠宇)와 대문만 다행히 재해를 면하였다. 이에 동년 강당을 중건하여 2003년 11월 25일에 입주상량(立柱上樑)하였고, 2004년 2월에 준역(竣役)하니 기쁘지 않으랴. 일전(日前)에 공의 후손 장수(長洙) 정보(正保) 인근(仁根)보(甫)가 와옥을 내방(來訪)하여 저에게 증산서원 중수기(重修記)를 위촉하므로 아는 것도 적고 불문(不文)이긴 하나 이 기문(記文)을 짓는다. 한 뿌리 천 송이로 핀 후윤(後胤)들은 창계공(昌溪公)의 인간상도의 교훈과 의절(義節)을 천명함으로써 힘차게 매진하며 친목하고 나태하지 않으며 바라건대 효도하고 충신하며 조상을 숭배하고 어진이를 존경하며 이익 앞엔 정의 그리며 형제간에 우애 깊고 생명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사도(士道)를 선양하기를 비옵나이다. 여기에 큰 이름은 적지 않고 길이길이 변함없고 나라 위해 생명 받친 능상절의 저 양귀비꽃 보다 붉은 마음 그 단심(丹心)은 저 한청상(汗靑上)에 길이 빛나리라. 이로써 애오라지 기문으로 삼을 뿐이다. 단기(檀紀) 4337년 갑신(甲申) 4월 18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慶北大學校 名譽敎授) 문학박사(文學博士) 서수생(徐首生) 삼가 쓰다.」
甑山書院重修記
舞鶴巍巍千古碧 匡廬汨汨萬年淸 舍魚取熊傲霜節 百世宛如蟾魄祥 光郁靄佳氣葱蘢 烟柳 千家曉風花百里 春玆土有山紫水明 內西元溪里迺卽 達城徐氏縣監公派 後胤取熊義士 諱應時號昌溪公之 奕世世居地也 鵠嶺奉翊大夫版圖判書達城君諱晋 爲肇祖龜溪先生五代孫也 昌溪公中宗辛卯生(一五三一年) 從遊重峯趙憲先生門讚究于氣發理乘設竄謫之日 公擔椅子隨 後十載如一日 宣祖辛卯年 倭國使臣僧玄蘇柳川 入釜山港 重峯先生 持斧伏闕前上疏于 倭使處斷主倡 倭之侵掠對備 官不容納矣然 而翌年宣祖壬辰突發 史上未曾有之 漆齒亂島夷二十萬 渡海蹂躪於 槿域能化屍山血河 趙重峯先生奮起倡義 昌溪公從師 便合騎虛擊敵迺 收復淸州樹功矣至 八月十八日也 遂將遇倭敵小早川隆景大軍于 錦山景陽臺下奮戰 以衆寡不敵 從先生望北泣血 與七百義士指天畵地 祈願社稷 白民之安全 以忠義殉國 胡不聖哉諶是 七百義塜者錦山所在 以史蹟百五號 忠國取熊士趙重峯先生 與騎虛大師麾下 七百義士之遺骸奉安墓所 昌溪公重峯先生之參謀 七百義士中一英靈也 忠莊公柳琳仁祖戊寅(一六三八) 謹竪殉義碑 與創建從容祠 年年歲歲八月十八日 追悼讚仰厥 貞忠義節 則斷未魔的 日帝輒破殉義碑 曁松雲碑未久倭帝敗戰 迨祖國光復也 地方官民 竭誠盡敬復元竪碑祠塚上 與月萬古長不滅 肅宗丁卯 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忠烈 高宗丙寅 匡廬甑峯之 北斗山下元溪上移建齋閣 胄孫鎭祐殫誠 大韓民國 庚寅突發 六二五動亂 辰全燒燬盍心痛 癸巳後胤絜誠展敬復元 重建爰得士林公議從 此齋舍迺昇書院 闔說哉癸未五月 我被颶風雨之災 大破講堂 而祠宇曁大門免災幸矣迺重修 講堂十一月념五日立 主上樑甲申二月竣役 奚不說哉不日前公之後裔長洙 正保仁根甫 來訪蝸廬囑俺重修記謏識不文 而撰之焉一根千朶公之後胤 以闡昌溪公彛訓 義節贔屭亹和不倦庶 冀禱于孝悌忠信 崇祖尊賢 見利思義 塤篪雅奏 舍生取義之士道喧楊也 曰若哦厥大名 不朽長無 古殉節丹心照汗靑是 以聊以爲記文而耳
檀紀 四三三七年 甲申 四月 十八日
慶北大學校名譽敎授文學博士 徐首生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