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만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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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만달(徐萬達)

1925년에는 서상일·정운해·서만달 등과 함께 농촌 개량과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대구농촌사를 설립하였다.


백학 학원

경상북도 영천에 1921년 1월 사립으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

[개설]

백학 학원은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에 있는 백학서당[옛 백학서원의 후신]에서 1921년 1월 설립된 신학문 교육 기관으로 민족 교육을 통해 이육사(李陸史)[이원록(李源祿)]·조재만(曺再萬)[조용찬]·안병철(安柄喆)·이진영(李進榮)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이다. [설립 목적] 백학 학원은 1921년 1월 신학문 교육 기관으로 설립되어 백기만(白基萬)·서만달(徐萬達) 등의 교사들이 민족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변천]

1921년 1월 백학서원의 후신인 백학서당의 건물에 백학강습회를 개설하였는데, 백학 학원의 전신이다. 영천 지역의 유지인 조병건(曺秉健)은 당시 교육열과 향학열에 부응하여 설립하였다. 백학 학원은 설립 이후 한때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정도로 면민이 일치단결하여 경영하였으나 1924년경부터 경영이 점전 어려워지게 되었다. 1924년 3월부터 영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시온촌(時溫村)의 동인들이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경영하면서 백학 학원을 맡아 경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시온촌 동인들은 1925년 10월경까지 거의 2년 동안 수많은 곤경을 겪으며 백학 학원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흉년으로 말미암아 생도는 60~70명으로 줄어들고 수업료도 2~3원에 불과하여 학원 경영이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 시온촌 동인들은 활동사진순회극단을 조직하고 1925년 10월 15일부터 영천군을 비롯하여 대구·경주·청도 등지를 순회공연하여 환영을 받았다. 또 순회공연의 수입금은 학교 유지비로 보충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대구노동공제회(大邱勞動共濟會)·대구 용진단(勇進團)·여명사(黎明社) 등과 유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받기도 하였다.

[현황]

백학 학원은 1921년 1월 설립되었으나 정확한 폐교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어 백기만·서만달 등의 교사들이 민족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그 결과 이육사·조재만·안병철·이진영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으로 기능을 수행하였다.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인 백학 학원은 최근까지 훼손되어 있었으나 국가보훈처로부터 2013년 2월 18일 현충시설(33-1-47)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 2015년부터 본채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 국비 1억 6천 8백만원, 도비 1억 2천 1백만원, 시비 2억 7천 2백만원 등 5억 6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2017년 12월 준공되었다. 또한 대문채도 2019년 영천시에서 시비 1억 5천만원을 투입,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백학 학원은 설립 이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교육을 통해 성장한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1]]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2]] 달성서씨 서진 시조묘소 참배 [[3]] 대구서씨 서한 시조묘소 참배 [[4]] 연산서씨시조 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5]]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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