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와 같이 정리된 세 책의 테이블 데이터를 확인해 보면, 『사변록』에서는 총 15회의 인용 관계가 나타났으며, 『녹문집』에서는 43회, 『경사강의』에서는 74회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의 표는 학이편 전체 문장에 대한 인용 문장의 비율을 계산한 것이다.
| 분석대상 | 총 문장수 | 인용 문장수 | 인용문 비율 |
|---|---|---|---|
| 사변록·논어·학이편 | 25 | 15 | 60% |
| 녹문집·논어·학이편 | 63 | 43 | 68% |
| 경사강의·논어·학이편 | 84 | 74 | 87% |
『사변록』은 학이편 25구의 문장 중에서 총 15회로 60%의 인용 관계가 나타났고, 『녹문집』은 63구의 문장 중에서 총 43회로 68%의 인용 관계가 나타나며, 『경사강의』는 84구의 조문과 조대 중에서 총 73회로 87%의 인용 관계가 나타난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경사강의』는 대부분의 논의가 인용을 통해 이루어졌고, 『사변록』이나 『녹문집』 역시 절반이 넘는 문장에서 인용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세 책에서 인용된 문헌과 피인용자의 인용 빈도이다. 『논어집주』라는 문헌을 인용했다고 하더라도 『논어집주』에 실린 정자나 사량좌 등의 설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피인용자가 모두 주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이 점에 유의하여 ‘문헌과 문헌’ 및 ‘인물과 인물’간의 인용 관계로 나누어 표를 작성하였다.
| 출처문헌 | 논어집주 | 논어 | 사서대전 | 주자어류 | 기타 | 총계 |
|---|---|---|---|---|---|---|
| 사변록 | 12 (80%) | 0 | 0 | 2 | 1 | 15 |
| 녹문집 | 27 (63%) | 1 | 5 | 4 | 11 | 43 |
| 경사강의 | 25 (34%) | 24 (32%) | 1 | 12 | 12 | 74 |
| 피인용자 | 주희 | 공자 | 정자 | 사량좌 | 기타 | 총계 |
|---|---|---|---|---|---|---|
| 박세당 | 8 (53%) | 0 | 1 | 2 | 4 | 15 |
| 임성주 | 24 (56%) | 0 | 10 (23%) | 1 | 8 | 43 |
| 정조 | 33 (45%) | 21 (29%) | 2 | 2 | 16 | 74 |
17~18세기 조선유학은 주자학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듯이 『사변록』, 『녹문집』, 『경사강의』 모두 문헌은 『논어집주』를, 인물은 주희를 가장 많이 인용했다. 『사변록』에서는 『논어집주』를 12회 인용하였으며, 『녹문집』에서는 27회, 『경사강의』에서는 25회를 인용했는데, 『경사강의』에서 『논어』를 『논어집주』와 비슷한 빈도인 24회 인용한 것으로 보아, 중국 주석 뿐만 아니라 경문의 의미 자체에도 집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박세당은 주희를 8회 인용했고, 임성주는 주희를 24회, 정자를 10회 인용했으며, 정조는 주희를 33회, 공자를 21회 인용하였다.
이 결과를 Gephi로 시각화하면 아래와 같다. (Gephi는 오픈 소스로 공개되어 있어 해당 사이트(https://gephi.org/)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후 사용할 수 있는데, 현재 다운로드 가능한 버전은 0.10이다.) Gephi를 활용하여 제작한 그래프는 텍스트에서 사용된 개념어를 나타내는 노드(Node)와 개념어 사이의 연결 정도(Edge Weight)를 보여주는 선(Line)인 엣지(Edge)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 연관성이 많을수록 노드의 크기가 커지고 가까워지며 엣지는 굵고 진하게 나타난다. 반대로 연관성이 적을수록 노드는 크기가 작아지고 멀어지며 엣지는 가늘고 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문헌간 인용 관계 시각화
인물간 인용 관계 시각화
위의 시각화 결과를 보면, 1회만 인용된 문헌이나 인물들은 가느다란 선으로 멀리에 배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또 『사변록』과 『녹문집』, 『경사강의』에서 동시에 인용한 문헌은 세 책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그래프를 통해 『논어집주』외에도 『주자어류』가 세 책에서 모두 인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녹문집』과 『경사강의』에서 동시에 인용한 문헌은 『논어』, 『사서대전』, 『맹자집주』,『근사록집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물간 인용 관계 역시 세 학자는 주희 외에도 정자와 사량좌를 공통적으로 인용했으며, 임성주와 정조는 모두 맹자와 윤돈을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앞서 소개한 인용정보 및 인용형태에 대한 데이터의 통계를 표로 정리한 것이다.
| 분류1 | 분류2 | 사변록 | 녹문집 | 경사강의 |
|---|---|---|---|---|
| 인용정보 | 經引 | 1 (7%) | 4 (9%) | 25 (34%) |
| 中引 | 14 (93%) | 39 (91%) | 48 (66%) | |
| 韓引 | ||||
| 인용어 유무 | 明引 | 14 (93%) | 20 (47%) | 29 (39%) |
| 藏引 | 1 (7%) | 14 (33%) | 33 (45%) | |
| 暗引 | 9 (21%) | 11 (15%) | ||
| 유사도 | 全引 | 5 (33%) | 5 (12%) | 14 (19%) |
| 改引 | 5 (33%) | 9 (21%) | 23 (31%) | |
| 摘引 | 5 (33%) | 29 (67%) | 36 (49%) | |
| 인용형태 | 分引 | 7 (47%) | 15 (35%) | 11 (15%) |
| 合引 | 3 (7%) | 10 (14%) | ||
| 連引 | 7 (47%) | 17 (40%) | 26 (35%) | |
| 複引 | 7 (9%) |
인용정보에 대한 통계를 보아도, 정조는 다른 학자들에 비해 『논어』나『맹자』등의 경문을 25회 인용 함으로써 7~9%의 다른 책에 비해 34%라는 높은 인용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정조나 문신들은 인용문의 출처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서로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인명이나 서명을 생략해서 문장만 인용하는 藏引의 방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45%), 심지어 문장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만 요약적으로 언급하는 摘引의 방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49%). 또 한번의 질문에 여러 문장을 연속해서 인용하는 連引의 방식을 많이 사용하며(35%), 한 문장을 나누어 두 개 이상의 문장인 것처럼 인용하는 分引, 서로 다른 출처의 문장을 하나의 문장인 것처럼 합쳐서 인용하는 合引,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는 複引의 방식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임성주는 누구의 설인지와 그 문장까지 함께 밝히는 明引의 방식을 주로 사용하지만(47%), 문장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약해서 인용하는 摘引의 방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67%).
박세당 역시 누구의 설인지 인명과 인용하고 있는 문장을 함께 밝히는 明引 방식이 대부분이지만(93%), 그 인용한 문장을 변형해서 쓰기도 하고(改引), 그대로 쓰기도 하며(全引), 요약해서 쓰는(摘引) 다양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다음은 이를 네트워크 그래프로 시각화한 것이다.
인용정보 시각화
인용형태 시각화
다음은 인용목적에 대한 통계와 네트워크 그래프이다. 세 책의 인용률이 가장 높은 문헌이 『논어집주』이고 인물이 주희인 것을 감안 하였을 때, 아래의 결과는 세 인물의 주자학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분류 | 사변록 | 녹문집 | 경사강의 |
|---|---|---|---|
| 正引 | 12 (28%) | 16 (22%) | |
| 借引 | 1 (7%) | 22 (51%) | 18 (24%) |
| 疑引 | 1 (7%) | 1 (2%) | 29 (39%) |
| 補引 | 7 (47%) | 5 (12%) | 8 (11%) |
| 駁引 | 6 (40%) | 3 (7%) | 3 (4%) |
인용목적 시각화
『녹문집』은 기존의 설로 자신의 견해를 대신하는 借引이 22회(51%), 전적으로 동감하는 正引이 12회(28%)으로, 그래프에서도 借引과 正引에 더 굵은 선으로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으며, 박세당과 반대로 매우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해석에서 그는 “주자는 여기에는 한 글자도 허투루 놓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또 한 글자도 고칠 수가 없다고 말하겠다. [朱子謂此無一字虛設 愚又以爲一字]”라든가, “이는 모두 理를 가지고 말한 것으로서, 이곳의 註와 합치하는 것이다. [此皆以理言之而與此註合焉者也]”, ”主於敬의 아래에 出於自然의 뜻이 없기 때문에 얼른 파악하기가 어려우나, 깊이 체득하면 集註와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主於敬下無出於自然之意故却難看 然深體之與集註無異也]”와 같은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주자의 해석에 권위를 싣고 있다.
또한 임성주는 『논어』를 해석함에 있어서 『사서대전』이나 『주자어류』 등을 참고하여 그의 철학을 전개해 나갔는데, 조선에서는 16세기 이후 이와 같은 저서들이 간행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철학적 탐구가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임성주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명으로, 이기론에 대한 균형적 사고를 확립함으로써 성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앞서 학문경향에서 임성주에 대해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경사강의』는 기존의 설에 의문을 갖는 疑引이 29회(39%)이고, 그래프에서도 疑引에 가장 굵은 선으로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으며, 借引이 18회(24%), 正引이 16회(22%)이므로 여기에도 굵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까지 정조의 학문에 대한 연구가 300여 편이 넘지만 아직도 주자학에 대한 정조의 학문 태도를 한 마디로 정의할 만한 일치된 견해는 없는 상황이다. 정조가 주자학을 正學이라고 했기 때문에 철저한 성리학 신봉자였다고 보는 입장이 있고, 『경사강의』에 나타나는 주자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비주자학자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해야겠지만, 본고에서 정리한 결과를 볼 때 정조의 학문태도를 ‘주자학을 인순하는데 만족하지 않은 비판적 회의주의자’라고 정의했던 한형조 교수의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한형조, 「正祖의 學問觀 : 朱子學의 批判的 復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제3집, 2000.)
정조는 경전을 존중하려면 주자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주자를 존숭하는데 요령이 있는데, 그것은 “의심하지 않았던 곳에서 의문을 갖고, 의문을 가졌던 곳에서 의심을 해소하는 것[無疑而有疑 有疑而無疑]” 이다.(『弘齋全書』卷五十, 「策問三·大學」) 정조는 주자학의 진정한 고질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지키겠다는 사람들, 주자학 자체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논평도 없고, 그리하여 이에 반하는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고루한 권위주의적 태도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정조는 주자학의 복고를 기획했으며, 이를 위해 다양한 학문정책을 펴기도 했다. 주자학을 정통으로 존중하면서도 거기서 모호한 부분을 밝히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며,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해 나가 주자학에 기반한 경학의 새 모델을 정착하고 보급시키는 것이 정조가 기획한 주자학의 복고였다.
이와 같은 한형조 교수의 논의는, 긍정이 46%, 중립이 39%, 부정이 15%로 나타나는 본고에서의 분석 결과와도 일치하며, 또 앞서 학문 경향에서 밝혔듯이 “경문의 의미, 聖人의 위상과 역할, 주자학적 해석 방식, 학문과 정치의 관계 등 다양한 맥락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학문적‧정치적 담론 공간을 확장시켰다.”는 평가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특정 경문에 대한 여러 주석의 인용 양상을 체계화하여 데이터로 정리해보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이를 시각화하여 각 주석들간 관점의 차이를 파악해 보았다. 유가가 한자문화권 전통사상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해 왔다는 점에서, 이와 같이 유학경전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을 살피는 일은 동아시아의 정신사 내지 문명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조선시대 논어 주석에 한정되어 있으나, 추후 여러 연구자들과 연구방법을 공유함으로써 연구 대상을 동아시아 경학으로 확장시키고, 시대별ㆍ국가별 주석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이 본 연구의 최종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