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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사전: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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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릭
天翼·天益·帖裡·帖裏·千翼·貼裏
ckid costume0535
한글 철릭
한자 天翼·天益·帖裡·帖裏·千翼·貼裏
영문(음역) Cheolrik
영문(의미) Man’s coat
분류 일상복
성별
시대 고려, 조선
연령 성인
신분 모든계층
데이터 소스:
☞ 한국연구재단 한국복식사전 【철릭】



정의

  • 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들어 온 남자 포
  • Man’s coat with pleats worn during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해설

고려가사 중『정석가(鄭石歌)』에 “무쇠로 철릭을 마라나난” 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싸움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철릭을 쇠로 마름질하고 철사로 바느질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철릭을 입고 있는 고려인을 소개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자들이 흔히 입던 옷이다. 조선시대에도 서민들에게 계속 입혀졌으며 세종 26년(1443)에 명에서 편복(便服)과 함께 상복(常服)의 밑받침 옷으로 답호[搭護], 철릭이 사여된 후, 관리들은 겉옷의 받침옷으로 입었다. 비상시 겉옷을 벗으면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 없이 융복(戎服)으로 대신할 수 있었으며, 한쪽 혹은 양쪽 소매를 반소매로 만들고 따로 긴 소매를 만들어 매듭단추로 연결한 실용적인 옷이다. 임진왜란과 정유란 때에는 왕 이하 백관 모두가 철릭을 융복으로 입었다. 철릭의 다른 명칭인 천익(天益)은 조선 전기에, 첩리(貼裏)는 조선 중, 후기에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天益’은 『성종실록(成宗實錄)』 22년(1491) 8월28일 기록에 처음 등장하였고, 그 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4년(1622) 4월23일까지 나타났다. ‘天翼’은『경종실록(景宗實錄)』1년(1721) 6월4일에 처음 나타났고, 『고종실록(高宗實錄)』 20년(1883) 1월25일까지 기록되었다. ‘帖裏’는 『세종실록(世宗實錄)』7년(1425) 4월1일에 처음 나타났고, 『순종실록(純宗實錄) 부록(附錄)』 12년(1919) 1월 24일까지 기록되었다. 형태는 의와 상을 따로 재단하여 봉재한 옷으로 깃은 곧은 깃이며, 시대에 따라 의와 상의 길이와 폭, 주름의 처리방법, 깃, 소매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선후기로 가면 의보다 상의 길이가 길어지고, 치마 주름은 초기에 정교한 잔주름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넓어지며 치마 끝단까지 눌러 잡은 주름치마의 형태도 있다. 또한 후기로 갈수록 소매가 넓어지고 배래에 곡선이 생기며 한쪽 소매에만 매듭단추를 달게 된다. 철릭은 편복, 군복, 융복으로 왕, 문무관, 무인, 악인, 서민 등 모두 입었다.『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의하면 능에 갈 때는 왕과 문무백관이 모두 융복을 착용하였다.『속대전(續大典)』에 당상관의 융복은 남색 철릭, 당하관의 융복은 청현색 철릭, 교외로 왕이 행차 할 때는 홍색 철릭으로 제정했다. 『고종실록(高宗實錄)』권20 고종 20년(1883) 1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철릭을 사용하던 융복을 폐지하고 군복을 입도록 함으로써 철릭은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강순제, 1981, 「帖裏小考」, 『성심여대 논문집』 12집 【REF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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