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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환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6월 10일 (화) 17:08 판 (연구결과)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시를 통해 살펴본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현대사






파트 작성자(다수 가능)
조장 경제학과 정성현
목적 및 필요성 행정학과 소재환
연구 대상

경제학과 정성현

행정학과 소재환

디자인학부 김은지

디자인학부 한다연

온톨로지 경제학과 정성현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경제학과 정성현
연구결과 행정학과 소재환

디자인학부 김은지

디자인학부 한다연



















목적 및 필요성

광복 이후 약 30년 간의 대한민국 역사와 그 특징

올해(2025)로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은 현재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일궈낸 국가이다.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편의상’ 그었던 북위 38도선은 결국 해방공간에서의 이념대립 속에서 한 민족을 둘로 나눈 분단의 선으로 고착됐다. 일제강점기부터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앞장서며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백범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결기를 보였고, 유엔 역시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으나, 결국 1948년 5·10 총선은 남한 지역에서만 실시됐고 남북한은 각각 같은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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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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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 (1948)


각자의 정부가 수립된 이후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공산주의 적화통일을 목표로 김일성이 시작한 도박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간 남북이 합쳐서 약 15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약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한반도 내 전 국토의 파괴를 초래했다. 6·25 전쟁은 분단으로 갈라진 남과 북의 한민족을 ‘원수’로 만들어버렸고, 이후 남북한이 현재까지도 감내하고 있는 갈등과 분열을 낳았다.

한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주도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까지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 간 장기 집권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자행해 폭발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1960년 4월 19일에 발생한 4·19 혁명의 결과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해 하와이로 망명했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박정희 장군이 1961년 5월 16일에 일으킨 5·16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1]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을 통해 초창기 군 간부들은 고속 승진할 수 있었으나, 육사 8기생 등 후배 그룹들은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1950년대 군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청년장교들의 불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어 이른바 정군운동이 발생하는 등 쿠데타의 한 배경을 이루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의 하야 이후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 및 장면 정권은 부정축재자, 선거부정 관련자 청산을 비롯한 사회적 요구 충족이라는 4.19 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장면 민주당 정권의 신파와 구파 내분은 제대로 된 정치력 발휘를 저해하고 대립과 갈등만을 심화시켰다. 이런 환경에서 군부 내에서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정군 운동이 쿠데타로 이어졌다. 성공한 쿠데타군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했고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군정에 돌입했다. 30년 이상 지속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2]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전역하여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3공화국을 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장기 집권의 수순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서구 민주주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 및 비상조치를 발표하여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킴으로써 장기 독재 구상을 현실화했다.

10월유신으로 사실상 종신대통령이 됐던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1979년 10월 26일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80년 대한민국 역사에 가장 빛나는 경제 성장과 군부독재라는 엄혹한 어둠을 동시에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요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육사 11기생이 주축이 된 군인들은 1979년 12·12사태를 일으켜 군을 장악하면서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렸다.[3]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퍼져나갔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배후인 비상국무회의가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의 혐의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고, 군부의 진압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막을 내렸다.[4]


이상에서는 광복 이후 약 30년 간 대한민국 역사를 압축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이시기 대한민국은 독재와 그에 맞선 저항의 노력을 통해 민주화를 경험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이처럼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지속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을 중심으로 하여 경제 성장이 함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이시기의 대한민국은 매우 다면적, 복합적인 역사를 경험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각 개인은 끊임없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전술한 사건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개인이 여러 사건의 연속으로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해 대응한 방식은 각자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면, 이시기 복잡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가 등장할 수 있다. 그 시도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리 3조는 문학, 특히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 및 독재와 민주화를 경험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광복 이후의 문학 기조

19세기 이후 근대로 접어들며 기존 사회에 존재하던 여러 가치 영역이 분화되었다. 이에 따라 각 영역은 자율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예로 예술 역시 기존에는 종교, 도덕, 정치 등에 귀속되어 있던 영역이었으나, 그로부터 독립하여 예술의 자율성을 지향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의 흐름이었기에 근대 모더니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념 역시 자율성이었다.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문학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순수문학은 이러한 배경 아래 등장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순수문학의 예시로는 대표적으로 「현대 시」 동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1960년대 모더니즘 시가 있다. 이는 언어 실험이나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기본적인 태도로 갖는 시로, 전쟁과 민주화 가능성 좌절 및 군정권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불안과 혼란이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유발되는 허무의식과 자유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시이다. 같은 시기를 살아낸 참여문학 계열의 시인, 소설가 등이 쓴 참여문학과 시대적 배경은 공유하지만, 순수문학은 그로 인해 촉발되는 의식에 초점을 두고, 문학 작품 그 자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시들은 욕망과 좌절의 반복 구조 속에서 현실을 제거하고 허무의식이나 자유 문제에 관해 문학적인 변용을 활용함으로써 순수문학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김춘수 시인의 작품과 같이 의미가 제거된 시가 등장하기도 하고, 이승훈 시인의 작품과 같이 대상 자체가 제거된 시가 등장하기도 했다. 순수시는 언어 자체의 음향적 속성이나 내면 세계, 환상 세계 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5] 순수문학 계열의 위 두 시인에 대해서는 개별콘텐츠를 통해 살펴보았었다.

반면 순수문학의 반대편에 위치하는 참여문학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겸 문학가 장 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문학론'을 통하여 활성화되었다.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에 창간된 『현대 Les Temps Modernes』를 통하여 현실 참여의 문학론을 폈다.[6] 참여문학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 즉, 삶을 위한 문학을 지향하기에 문학의 목적은 곧 삶에 있다고 보고, 현실에 대한 참여와 현실반영을 중요 요소로 여긴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참여문학은 문학을 통해 반성과 사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하며, 궁극적으로 문학이 사회를 적극적으로 매개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와 무관할 수 없고, 인간 세계의 착취, 억압과 같은 부조리나 갈등의 양상을 작품에 잘 반영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7] 우리 나라의 현대문학사에서 '참여문학'이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며 그와 상대적 입장에 있는 순수문학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깊이 있게 전개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으며[8] 1968년 순수문학 계열의 이어령 시인과 참여문학 계열의 김수영 시인 간 벌어진 순수-참여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9] 우리 3조는 개별콘텐츠를 통해 한국문학사에서의 참여문학 계열에 속하는 대표적인 시인 신동엽 시인김수영 시인을 살펴보았었다.


이상의 검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근현대로 접어듦에 따라 한국문학사 역시 자연스럽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대립 구도로 흘러가게 되었다. 따라서 크게 순수시와 참여시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광복 이후부터 약 30년 간의 대한민국 역사를 다시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각 개인이 여러 사건을 겪고 그에 대응한 방식은 저마다 달랐을 것이다. 문학계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당연히 나타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이를 순수시와 참여시의 존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6.25 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등의 사건이 발생하고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을 당대를 살았던 모든 시인들은 동일하게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를 썼고, 그러한 경향성은 다시 크게 순수시와 참여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즉, 각 시인들이 쓴 시를 살펴보면 그들이 어떠한 사건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하여 그와 같은 시 세계를 구축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고, 그러한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당시의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조명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연구 대상

이승만 정권

이승만 정권과 그 치하에서의 여러 사건들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겪은 수많은 갈등과 참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6.25 전쟁으로 대표되는 이념 갈등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국토 파괴, 남북한 사이의 대립을 넘어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어 이에 조금이라도 동조하거나 우호적인 모습을 보일 경우 국가는 모든 공권력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정화"했다.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견도 없이 사회가 통합적인 자세를 가져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자들의 진의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인 조봉암 선생을 북한과 연계하여 사형에 이르게 한 진보당 사건 등을 보았을 때 단순히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의가 무엇이든,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자연스럽게 국가에 의한 폭력, 억압, 검열을 일상화하였다.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폭력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가운데 이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로 독재 체제가 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행해진 3.15 부정선거 등의 사건은 독재에 반대하는 4.19 혁명 등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갈등을 유발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에서 대한민국이 겪은 이데올로기적 갈등, 독재와 민주주의의 갈등은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를 통해 당대의 사회를 노래하고자 한 참여시의 입장에서 한 측면만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회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 독재 및 민주주의를 모두 다룰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여러 참여시인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가령 신동엽 시인은 6.25 전쟁을 겪고 이를 바라볼 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거부하였다. 『진달래 산천』에서 그가 본 6.25 전쟁은 "꽃 살이 튀는 산허리"에 "탄환을 퍼부"으며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기관포를 쏟"는 현장으로 오로지 토지가 어떻게 파괴되는 순간이며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선악의 구분에 놓이지 않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수영 시인 역시 6.25 전쟁을 직접 겪은 입장에서 그가 본 이 전쟁은 두 이데올로기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가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서 외치듯 그가 전쟁에서 본 것은 오로지 자유를 향한 탐색의 필요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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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중략)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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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동엽, 『진달래 산천』


두 시인이 이승만 정권 시기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인 4.19 혁명에 대해서 모두 관심을 가졌고 또 시를 통해 공통된 인식을 보였다는 점은 이데올로기적 갈등, 독재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갈등에서 두 시인이 목격한 자유의 상실, 폭력, 억압의 문제가 독재와 민주주의의 갈등에서도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앞의 신동엽 시인, 김수영 시인 모두 단순히 문제적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시를 매개로 지향점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동엽 시인『껍데기는 가라』, 『금강』 등을 통해 4.19 혁명의 정신을 노래하는 한편 동학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우리가 나아갈 길을 동학에서 모색한다. 그리고 김수영 시인은 자아에 초점을 두고 이전까지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자아의 개념을 4.19 혁명이란 거대한 사회적 사건을 계기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승격시킨다.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 차원의 연대, 협력을 통해 추구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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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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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독립운동가라던 이승만의 친일옹호와 미온적 개혁, 장기집권의 불만은 3월15일 부정선거로 폭발했다. 이날 마산에선 시민들이 항의했고 이날 사라진 김주열 학생의 행방불명 소식도 알려졌다. 북한 김일성만 적으로 규정한 채 사회 내부엔 적폐가 쌓여갔다는 것, 북한vs남한, 공산주의vs자본주의, 여당vs야당 등 혼란스럽고 명확하지 않은 전선을 간파한 김수영 시인은 전반적으로 혼란스럽고 스산한 기운이 지배하던 한국에서 1960년 4월 3일 『하…… 그림자가 없다』를 지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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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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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1960년 4월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 떠올랐다. 김주열에게 최루탄을 쏜 이는 일본 헌병대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박종표였다. 반민특위에 붙잡혔다가 풀려나 마산경찰서에서 ‘애국경찰’로 일하던 중이었다. 마산의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다. 1960년 4월19일 전 국민의 시위로 1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이승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국무위원들과 이기붕 부통령이 차례로 사퇴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25일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서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했다. 26일 오전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린 시민들이 경무대로 향하자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했다.[11]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수영 시인『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을 쓰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노래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 시기의 참여시인들은 연결되는 공통의 사건에 영향을 받았던 탓인지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인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과정상 동학 혹은 공동체라는 다른 방법론을 택하지만 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자유롭고 폭력과 억압이 사라진 세상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서 시의 예술성을 바라본 순수시는 그저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것인가. 어떤 이는 순수시가 현실을 외면했다고 비판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순수시가 참여시와는 다른 시적 지향을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순수시가 과연 이승만 정권에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는 김춘수 시인이승훈 시인을 동시적으로 보면서 살펴볼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순수시의 대표격인 시인으로 그의 『꽃』은 존재란 추상적인 대상의 본질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과 다른 언어의 사용을 추구하였다. 이승훈 시인의 경우 언어 자체에 더욱 주목하여 언어를 사용하는 기존의 관습을 흔들고 파격적이며 실험적인 언어의 재구조화를 시도하였다. 『비누』, 『이것은 시가 아니다』 모두 이러한 점을 대표한다.

그런데 앞서 결과적으론 하나로 수렴하는 양상을 보인 참여시와 달리 순수시는 경우에 따라 분화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즉 순수시에 대해 현실을 외면한다는 비판과 차별적인 시적 지향을 보인다는 옹호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으로부터는 전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1950~1960년 혼란스러운 시대에서도 굳건히 본인만의 시적 지향을 추구했다. 시에 현실에 대한 비판 및 참여를 적극적으로 넣는 대신 시의 미학성을 극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시적 실험, 허무주의를 통한 현실에 대한 초월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춘수 시인은 이를 모든 시에 걸쳐서 관철하지는 못했다. 그가 『전두환 대통령 퇴임 시』 등 전두환 정권 시기 당시의 정권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시인 본인의 본심과는 무관하게 1950~1960년대 그의 순수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것이다.[12] 반면 이승훈 시인은 후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승훈 시인 역시 순수시를 추구하면서 언어의 해체와 실험적 기법 그리고 존재에 대한 탐구를 끊임없이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승훈 시인김춘수 시인과 달리 시의 미학성을 통해 인간, 폭력, 불안, 존재 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나아갔다. 분명히 그의 시는 현실의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고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촉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시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다룬 것들은 한편으로 6.25 전쟁, 4.19 혁명 등 현실의 사건들이 존재론적 수준에서 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즉 그는 표면적인 사건을 다루진 않았지만 오히려 참여시보다 그 사건을 더 본질적으로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 시대의 순수시는 수렴적 양상을 보였던 참여시와 달리 시인에 따라 다층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들은 때로 시인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시의 언어적 기능을 통해 참여시보다 현실을 더욱 깊이 있게 바라볼 가능성을 보인 것도 순수시이기에 한 가지 시각의 해석만으론 순수시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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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 태어나신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 마음 한반도의 등줄기 소백의 긴 매 뿌리 뻗어내려 후미지고 아늑한 분지를 이룬 곳

(중략)

님이 헌헌장부로 자라 마침내 군인이 된 것은 그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략)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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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춘수, 『전두환 대통령 퇴임 시』


박정희 정권

박정희 정권은 한국 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독재, 발전과 억압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시대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군사 정부를 수립한 뒤 점차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로 나아갔다.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고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을 통해 눈부신 물질적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노동권과 인권은 체계적으로 억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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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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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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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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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아픈 몸이』


1961년 5·16 쿠데타로 1년 여의 권력공백을 군인들이 차지한 상황 속에서 김수영 시인『먼 곳에서부터』『아픈 몸이』라는 시를 썼다. 해방과 억압, 민주화와 독재의 교차 과정을 바라보며 그는 고통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먼 곳에서부터』를 통해 절망을 드러냈지만 『아픈 몸이』 희망도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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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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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인『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쓴 1965년에는 독재도 일상이 되고, 저항도 과거가 됐다. 이제 사람들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도 조그마한 것에 분개하는 등 적응한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이 비겁한 모습을 이토록 진솔하게 표현한 이유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한 김수영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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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중략)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중략)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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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한 번 대선에 출마한 1967년, 김수영 시인은 이 시에서 아들을 부른다. 선거 3개월 전 김수영은 독재자의 재선을 예측하며 미래 세대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13]

1972년의 유신헌법 제정은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대통령 1인에게 입법, 사법, 행정 전반에 대한 권력을 집중시키며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정권에 대한 비판은 곧 탄압과 검열로 이어졌다. 언론과 예술은 사상 검열을 받았고 반대 인사들은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구속되거나 제거되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그늘 아래 빈부 격차, 도시 하층민의 증가, 노동 착취와 같은 문제가 심화되었고,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점차 문학과 예술을 통해 터져나왔다. 이 시기의 참여시는 독재를 비판하고 민중의 삶을 조명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와는 다른 결의 시 세계를 지닌 시인으로는 김춘수 시인이 있다.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삼가고, 시의 본질과 존재론적 문제에 집중하는 순수시의 흐름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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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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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춘수, 『꽃』


『꽃』에서 김춘수 시인은 이름과 존재의 관계를 통해 언어의 창조적 힘을 탐구한다. 이 시는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존재의 본질과 시적 언어의 미학적 가능성에 몰두한 그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순수시적 접근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을 직접 담은 참여시와 대조되며,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과 함께 독자적인 시적 지향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김춘수 시인의 시는 예술적 순수성을 고수하며 시대의 정치적 갈등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전두환 정권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폭력과 민주주의 억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체제 유지를 위한 권력의 자기 방어와 이에 맞선 국민의 저항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대였다. 1979년 12·12 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 사건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게 군이 실탄과 곤봉을 사용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낳은 비극으로, 단순한 지역적 충돌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적으로 간주한 명백한 국가 폭력이었다.[14] 전두환 정권은 이후 언론 통폐합, 야간 통행 금지, 정치 활동 금지 등 강압적 조치를 통해 반대 목소리를 원천 봉쇄했다. 특히 삼청교육대와 같은 ‘사회 정화’ 운동은 ‘질서’와 ‘안보’를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일상화했으며, 표현과 집회의 자유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체제 비판은 반국가 행위로 낙인찍혔고, 선거는 형식적 절차로 전락하며 대통령은 간선제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군부의 통제 아래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러나 억압 속에서도 저항의 목소리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촉발했고, 이어진 6월 민주항쟁은 오랜 침묵을 깨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항쟁은 6.29 선언을 이끌어내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성취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15] 전두환 정권 하에서 제도권 정치는 철저히 통제되었지만, 문화와 예술은 억압된 시대의 현실을 드러내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검열, 금서 지정, 공연 불허 등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들은 상징, 은유, 암시를 통해 현실을 고발하며 시대의 고통을 기록했다. 연극, 시, 민중가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특히 1980년대 민중문학은 권력의 감시를 피해가며 언어 실험과 서사 구조를 통해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러한 문학적 움직임은 단순한 정치적 저항을 넘어 인간성, 공동체, 정의에 대한 성찰로 확장되었다.

참여시인들은 민중의 고통과 희망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며 사회적 변화를 촉구했고, 순수시인들은 언어의 실험과 존재론적 탐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대의 불안과 위기를 반영했다. 이 시기 이승훈 시인은 순수시의 틀 안에서 실험적 언어와 형식을 통해 억압된 현실과 인간 내면의 위기를 조명했다. 그의 시 『비누』는 언어의 기존 관습을 깨며 진실과 자유의 불확실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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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는 미끄러진다

손에서, 말에서, 시간에서

거품은 터지고

아무도 그를 붙잡지 못한다

(중략)

비누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말이 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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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승훈, 『비누』


『비누』에서 이승훈 시인은 비누의 미끄러운 성질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통제된 사회에서 진실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현실을 은유한다. 시의 단편적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언론 통제와 검열로 왜곡된 사회의 분열된 상태를 반영하며, 언어 자체를 저항의 도구로 삼는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이것은 시가 아니다』는 전통적 시의 규범을 해체하며 억압된 사회에서 시의 본질을 질문하지만, 그 추상적이고 수행적인 성격상 구체적 인용은 생략한다. 이승훈의 실험적 접근은 참여시의 직접적 비판과 달리, 언어의 재구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제의 억압과 소외를 드러낸다.

한편, 김수영 시인의 영향을 이어 받은 참여시인들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 억압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김수영 시인은 이미 1960년대에 4.19 혁명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자유와 공동체를 노래했지만, 그의 시적 정신은 1980년대 민중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김수영 시인『풀』에서 보여준 일상적 이미지(풀)와 저항의 상징성은 전두환 정권 시기 참여시인들에게 계승되었다. 1980년대 시인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과 같은 사건을 상징적으로 다루며,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중의 의지를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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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눕는다


비를 맞아 눕는다


바람에 눕는다


(중략)


그러나 풀은 다시 일어선다


뿌리 깊은 곳에서 다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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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영, 『풀』


이처럼 전두환 정권 시기의 시는 참여시와 순수시로 나뉘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했다. 이승훈 시인의 순수시는 언어 실험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간접적으로 억압의 부조리를 드러냈고, 김수영 시인의 영향을 받은 참여시인들은 민중의 고통과 저항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며 사회적 변화를 촉구했다. 이 두 흐름은 디지털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시의 언어적 패턴과 사회적 사건의 상호작용을 데이터로 분석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 현실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기록되고 저항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온톨로지

온톨로지 시각화 그래프





Class

Class Description(subClass) sample(ID)
인물 시인 신동엽,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
사건 민주화운동 / 전쟁 / 쿠데타 / 기타 4.19_혁명, 5.18_민주화운동, 6월_민주항쟁 / 6.25_전쟁 / 5.18_쿠데타, 10월_유신, 긴급조치, 12.12_사태 / 동학농민운동
계열 문학 계열 순수문학, 참여문학
정권 독재 정권 이승만_정권, 박정희_정권, 전두환_정권
작품 신동엽_시인 / 김수영_시인 / 김춘수_시인 / 이승훈_시인 누가_하늘을_보았다_하는가, 진달래_산천, 금강, 껍데기는_가라 / 우선_그놈의_사진을_떼어서_밑씻개로_하자, 하.... 그림자가_없다, 어느날_고궁을_나오면서, 먼_곳에서부터, 조국에_돌아오신_상병포로_동지들에게, 내가_겪은_포로생활 / 꽃, 전두환_대통령_퇴임_시 / 이것은_시가_아니다, 비누
생애(경험) 생애(경험)-김수영 시인 의용군_강제_징집




Relation

Relation Description(source-target Class) sample(source - target ID)
~을/를_썼다 인물-작품 김수영_시인 - 조국에_돌아오신_상병포로_동지들에게
~에_속하는_작품을_썼다 인물-계열 김수영_시인 - 참여문학
전쟁_중_~을/를_겪었다 인물-생애(경험) 김수영_시인 - 의용군_강제_징집
~때_일어났다 사건-정권 6.25_전쟁 - 이승만_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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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_인해_발동되었다 사건-사건 긴급조치 - 10월_유신
~을/를_비판했다 정권-정권 박정희_정권 - 이승만_정권
~을/를_계승했다 정권-정권 전두환_정권 - 박정희_정권
~을/를_배경으로_한다 작품-사건 내가_겪은_포로생활 - 6.25_전쟁
~을/를_배경으로_한다 작품-생애(경험) 내가_겪은_포로생활 - 의용군_강제_징집
~이후에_출간되었다 작품-정권 비누 - 전두환_정권
~이후에_출간되었다 작품-정권 꽃 - 박정희_정권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우리가 그린 지식관계망

3조 지식관계망 [16]





연구결과

* 시맨틱 데이터 구축 및 디지털 큐레이션을 하면서 도출한 사항을 기술(사실적인 관계와 사실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추정 등)
* 처음 그렸던 지식 관계망과의 비교(크게 어떠한 점이 달라졌는지), 시맨틱 데이터 구축 시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 등을 기술
* 중요한 부분은 글자를 진하게 처리하세요.

지식관계망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부터 우리 조가 꾸준히 고민했던 것은 콘텐츠 구성에 있어 참여문학(참여시)과 순수문학(순수시)의 지위였다. 광복 이후의 역사를 두 문학경향을 큰 축으로 하여 살펴보았기 때문에 해당 요소들은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지식관계망을 작성하고 팀프로젝트의 초기 목차 구성할 때 우리 조는 연구 대상의 내용을 각 정권과 그 정권 아래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어 서술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개별 역사적 사건들까지도 하위 목차로 분류해두었을 때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우리 조원들이 개별 콘텐츠로 분석한 시인들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관한 정보에 새롭게 조사한 지식을 더하여 팀프로젝트 내용을 큐레이션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에 따라 내용을 분류하면, 분석 내용의 연결성이 단절되는 인상을 주었다. 그렇기에 구체적 사건은 하위 목차에서 제외하고, 정권에 따라 시기를 나누는 방향으로 목차를 수정하여 각 시인의 생애 및 작품 활동을 연속성 있게 구성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간의 비중에 관한 문제였다. 순수문학은 참여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참여적인 경향이 덜해 구체적인 정권이나 사건과 연결되는 분량이 적은데, 사건을 시기 분류 기준으로 두어 목차를 구성하게 되면 하위 서술 과정에서 순수문학의 비중이 적어져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양자의 비중을 동등하게 맞추고자 현재 목차로 수정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지식관계망을 그릴 때는 순수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을 구체적인 사건과 아예 연결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개별 콘텐츠를 통해 각 시인을 분석하고, 그에 기반해 팀프로젝트 연구를 진행하면서 순수문학도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연결되는 특성이 존재하며 그 중요성이 크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다만 사회 및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는 정도와 순수문학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을 고려하였을 때, 참여문학과는 확실히 구분되도록 그래프를 구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따라서 참여문학은 지식관계망을 그릴 때 설정하였던 기존의 "~을/를_배경으로_한다" 릴레이션을 활용하여 노드를 연결하였고, 순수문학은 "~때_출간되었다", "~이후에_출간되었다"라는 별도의 릴레이션을 신설하여 각 노드들을 연결하였다. 추가적으로 1차 발표 때 받은 피드백을 반영하여 순수문학과 참여문학노드 및 각 문학계열에 속하는 작품의 아이콘을 다르게 설정하여 가독성을 높이고 강조점을 두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