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팀프로젝트 3조 정성현
Jamie's DH Wiki
| 3조 인물 정보 | |
|---|---|
신동엽 시인 (전통문화포털) | |
| 이름 | 신동엽 |
| 생년 | 1930년 |
| 몰년 | 1969년 |
| 국적 | 대한민국 |
| 계열 | 참여시 |
| 호 | 미상 |
| 유형 | 시인 |
연구목적 및 필요성
3조는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과 세 차례의 독재를 거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수많은 매체 중 시를 선택한 이유는 이 시기의 시가 참여시와 순수시라는 상이한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참여시와 순수시는 각자가 추구하는 시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즉 시에는 한 시대에 대해 다양한 인식이 들어 있고 이를 통해 시대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동엽 시인은 참여시의 거두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비록 신동엽 시인은 1959년 문학계에 등단하고 불과 10년 후인 1969년에 사망하는 등 시인으로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가 활동한 시기는 4.19 혁명의 한복판이었으며, 그의 시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연관성이 깊다. 당장 그의 대표적인 시인『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껍데기는 가라』모두 당대의 상황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이렇게 신동엽 시인의 시는 4.19 혁명을 통해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이에 대한 시적 방법론을 타진했다는 평을 받는다.[1] 이를 방증하듯이, 그는 사망하기 직전인 1967년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금강』을 발표하는 등 역사적인 소재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고민하는 것으로 본인의 사유를 확장하였다.
이처럼 신동엽 시인에게 시는 곧 현실이었고 그는 시를 통해 현실과 소통하며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했다. 때문에 그는 마찬가지로 현실과 가까워지기를 택한 참여시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 대상
신동엽 시인의 생애
신동엽(1930~1969) 시인은 부여에서 태어나 광복 이후 전주사범학교에 재학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 신동엽 시인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친일 청산과 토지개혁에 항의하기 위한 동맹 휴학에 참여하다가 퇴학되고 고향인 부여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지만 곧장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역사와 민족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2]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의 인민군은 전쟁이 일어나고 불과 1달만에 부여까지 내려와 그곳을 점령했다. 당시 점령지에서 공산화 작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을 하던 인민군을 본 신동엽 시인은 인민군에 협력하여 민주청년동맹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활동도 1년을 넘기지 못했고 그는 정반대의 남한 소속 국민방위군에서 활동하면서 휴전을 맞이하였다.[3] 6.25 전쟁으로 본 신동엽 시인은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아니었다. 『진달래 산천』에서 소위 "빨갱이"도 우리 민족의 구성원으로 본 그에게 이 전쟁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민족의 비극이었다. 이처럼 그는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다.
6.25 전쟁이 휴전의 형태로 끝나고 신동엽 시인은 다시금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문학계에 등단했다. 그러다 1960년에 그는 당시 일어난 4.19 혁명을 목격하고 당시 학생들의 시를 엮은 『학생혁명시집』을 발표했다. 1960년 이후에는 4.19 혁명을 모티브로 하여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 등 다수의 작품을 썼으며 1963년, 1967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아사녀』와 장편서사시인 『금강』을 발표한다. 그리고 1969년 신동엽 시인은 불과 38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요절하였다.
한편 신동엽 시인이 생전 발표하지 않았던 시들은 대부분은 그의 사후 부인인 인병선 여사가 발간한 유고집인 『신동엽전집』 덕분에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유고집은 1975년 당시 출판된 직후 유신헌법에 따른 긴급조치 위반으로 판매가 금지되었고 그 이후에야 다시 출판될 수 있었다.[4] 이는 신동엽 시인의 시가 가진 저항적 성격이 특정한 사건, 인물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신동엽전집』의 출판에 참여했던 창작과비평은 신동엽 시인을 기리고자 1982년 신동엽창작기금을 조성하여 문인을 지원하였으며 현재는 신동엽문학상이란 이름으로 매년 신동엽 시인의 정신을 계승한 작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신동엽 시인의 시적 특징
신동엽 시인의 시적 특징은 우선 참여시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동엽 시인은 당대의 현실을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에게 현실은 군부 독재, 전쟁, 수탈과 같이 각종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문제적 장소였다. 따라서 작금의 현실에서는 세계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바, 오직 시를 통해서만 그가 추구한 본질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시는 단지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혁을 추동하는 도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신동엽 시인에게 시는 시인이 바라는 혁명적이고 미적인 순간을 언어로 구체화하는 차원에 이르게 된다. [5]
예를 들어 『주린 땅의 지도 원리』는 일차적으로 현실에 대한 시인의 시각을 보여준다. 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등 온갖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개인이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당대의 이상적 이데올로기하에서 투표를 통한 정치 참여를 시도해도 조국에 희망이나 좋은 징조는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체념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 시는 단순히 현실에 대한 비관, 비판 그리고 성토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는 희망을 던지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아사녀와 아사달의 사랑이 충만하고 창칼, 담이 모두 없어져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공간인 금강이다. 이처럼 시는 시인이 바라는 순간을 형상화하여 앞서 언급한 시인 본인의 혁명적이고 미적인 순간을 언어로써 구현한다.
한편 이렇게 시인이 꿈꾸는 순간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역사, 민족이라는 키워드는 신동엽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그의 시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 신동엽 시인을 토속적, 민속적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그는 역사를 통해 본인이 바라던 순간이 무엇인가를 모색하였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그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동학이다.
아래의 『금강』은 동학이 시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실 『금강』은 소재 자체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점에서 동학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신동엽 시인은 "지주도 관리도 은행주도 특권층도 없"고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가 이뤄지는 세상을 노래하는 한편 "모든 중생이여, 한울님을 섬기듯 이웃 사람 섬길지니라" 와 같이 동학의 주요 사상인 한울[6], 시천주(侍天主)[7]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본인의 지향하는 바가 단순한 소망을 넘어 동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물론 신동엽 시인만이 "지주도 관리도 은행주도 특권층도 없"고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가 이뤄지는 세상을 바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시대를 초월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소망이다. 하지만 신동엽 시인은 스스로가 어떻게 그러한 세상을 바라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한다. 신동엽 시인은 우리의 역사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찾았으며 그 해답이 조선 후기 민중의 종교로 기능한 동학이었던 것이다.
|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노비도 농사꾼도 천민도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우리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니라 (중략) 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울님을 깨달을 뿐 아무에게도 옮기지 못하니 라 모든 중생이여, 한울님 섬기듯 이웃 사람을 섬길지니라 |
||
| 출처: 신동엽, 『금강』 | ||
신동엽 시인과 4.19 혁명
4.19 혁명은 신동엽 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4.19 혁명의 배경이 된 독재 정권 시기 자체가 신동엽 시인에게는 위기의 순간이다. 단순히 민주주의가 억눌리고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수준을 넘어 일상화된 폭력과 이분법의 논리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과 실존성이 위협받는다. 부인인 인병선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1960년 4월 19일 신동엽 시인은 "온 몸과 구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로 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았다."고 한다.[8] 신동엽 시인이 당시 4.19 혁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시가 아니더라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동엽 시인은 4.19 혁명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시로 표출하였다. 『학생혁명시집』 외에도 그가 직접 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는 단순히 4.19 혁명 하나의 사건에 대한 시가 아니라 4.19 혁명을 매개로 시인이 지향하는 바와 부정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가령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시인은 "티 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을 소망한다. 그리고 이를 가로막는 "먹구름", "쇠 항아리", "지붕"를 지적하며 이러한 것들을 거둬버리길 주문한다. 『껍데기는 가라』에서도 시인은 본인이 소망하는 바를 "사월(四月)도 알맹이",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으로 분명히 드러낸다. 특히 사월(四月), 동학년(東學年)을 4.19 혁명 그 자체와 동학농민운동 및 동학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시인의 인식을 명확히 추적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의 대상으로 몰아내야 할 무언가이다. 쇠의 이미지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에서 공유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역시 "쇠 항아리"처럼 "모오든 쇠붙이"도 부정의 대상이다.
앞서 이 시들은 4.19 혁명을 매개로 시인이 지향하는 바와 부정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그럼 지향하는 바는 <저항/생명/존엄>, 부정하는 바는 <억압/폭력/독재>와 같은 용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과도기적 정권을 무너뜨리며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유고집의 형식으로 출간되려던 신동엽 시인의 시들을 통제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신동엽 시인과 그의 시가 가진 저항적, 참여시적 성격이 단순히 특정한 인물과 사건을 겨냥한 것을 넘어 이와 유사한 속성을 지닌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박정희 정권은 이전 정권들의 실책을 명분으로 집권했기에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복권 등에도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면서 분명한 차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정권마저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과 그 정신을 노래한 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결국 이러한 점은 <저항/생명/존엄>의 보편적 가치를 노래한 신동엽 시인의 참여시는 당시의 현실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억압/폭력/독재>에서 <저항/생명/존엄>으로의 이행이 아니며 <억압/폭력/독재>의 자가복제에 불과함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4.19 혁명 (4.19 혁명 위키백과)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이상으로 신동엽 시인의 시와 시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신동엽 시인은 일제강점기, 6.25 전쟁, 4.19 혁명으로 인한 독재 정권의 붕괴까지 민족의 험난한 역사를 직접 경험한 시대의 증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목격한 바를 고스란히 시에 담았고 이는 그가 참여시인이라 불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체적으로 신동엽 시인은 현실의 비극적인 사건을 시의 주제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해당 사건과 당시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이러한 사유의 과정에서 신동엽 시인은 동학을 매개로 한 민족적 요소를 지향점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이때 위와 같은 분석은 두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이는 시 자체에 대한 분석만으로 도출이 가능하다. 가령 『껍데기는 가라』의 경우 신동엽 시인의 생애 등에 대해 알지 못해도 “”사월(四月)도 알맹이",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과 같은 시어를 통해 이 시가 4.19 혁명을 다루고 있으며 동학을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한다는 점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분석 방법의 독창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사후적이다. 즉 우리는 신동엽 시인이 동학에 관심이 많아서 시에 동학을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시에 동학의 요소가 있는 것을 보고 시인이 동학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반적인 교과서적 분석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이와 같은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우리는 신동엽 시인과 그의 작품, 그의 생애를 노드로 나타내고 이를 동시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럼 우린 이 그래프를 통해 어떤 분석을 할 수 있을까? 바로 신동엽 시인이 동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즉 동학을 시상으로 삼게 된 연유를 그의 생애와 연결하여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동엽 시인은 부여를 고향으로 하는데 부여는 동학의 영향을 받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동시에 신동엽 시인의 작품 중에는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 있다. 이를 연결하여 우린 신동엽 시인이 동학을 시상으로 한 배경에 그의 고향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물론 큐레이션을 통해서도 같은 추론을 할 수 있겠지만,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는 시인, 작품, 생애를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요소들 사이의 사후적 해석이 아닌 동시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구축할 때 중점으로 고려한 것은 Relation의 표현 방식이었다. 초반에는 하나의 Relation이 가능한 많은 연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자체의 가독성과 표현력을 높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구축 과정에서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의 범위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이/가 ~을/를 금지했다",“~이/가 ~을/를 제정했다",“~을/를 견제했다”의 Relation은 한 번만 사용하는데 꼭 포함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레이션에서 알아낸 이승만 정권에서 불편하게 여겼을 신동엽 시인의 시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며 등장한 박정희 정권에서도 제한되었다는 사실 즉 당시 시대가 집권 세력의 변화와 상관없이 가졌던 부정적 요소의 연속성을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부각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가독성과 표현력에 영향을 주더라도 한 번만 사용할 Relation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궁극적으로는 큐레이션과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단순히 개별적인 시를 해체하는 것을 넘어선 방식으로 신동엽 시인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신동엽 시인의 시부터 시작해서 시가 갖고 있는 시상의 근원이 무엇이며 당시의 시대상과 연결하여 시가 어떻게 연속된 일련의 정권을 비판한다고 여겨졌는지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여시를 바라보던 시각을 재검토할 수 있다. 참여시는 단순히 시가 반영한 사건, 시어의 의미에만 주목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가 시대를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시의 주체는 시인이라는 점에서 시인에 대한 분석도 유의미한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 시를 통해 일방향적으로 시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권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시대가 시를 역으로 보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규제, 금지와 같은 제도적 조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즉 참여시는 시대에 발을 들였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시대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상의 점들은 지금까지 참여시를 시대에 대한 일방향적인 비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시대와 교류한다는 참여시의 본질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참고 자료
이미지
- 4.19 혁명 - 출처: 4.19 혁명 위키백과
논문 및 문헌
- 한세정, "신동엽 시와 예이츠 시의 비교 연구",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3권 제1호, 2022, pp.39.
- 박지영, "1960년대 참여시와 두 개의 미학주의 - 김수영, 신동엽의 참여시론을 중심으로 -", 반교어문연구 제20권, 2006, pp.274.
신문기사 및 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동엽".
- 문화일보, "4월의 시인 신동엽", 김선경, 2012.
- 한국일보, "저항시인 너머 인간 신동엽 새롭게 보기 시도할 때", 한소범, 2019.
- 노컷뉴스, "4.19 그날, 시인 신동엽도 거리에 있었다", 미상, 2006.
주석
- ↑ 한세정, "신동엽 시와 예이츠 시의 비교 연구",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3권 제1호, 2022, pp.39.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동엽".
- ↑ 문화일보, "4월의 시인 신동엽", 김선경, 2012.
- ↑ 한국일보, "저항시인 너머 인간 신동엽 새롭게 보기 시도할 때", 한소범, 2019.
- ↑ 박지영, "1960년대 참여시와 두 개의 미학주의 - 김수영, 신동엽의 참여시론을 중심으로 -", 반교어문연구 제20권, 2006, pp.274.
- ↑ 동학과 천도교의 신앙 및 숭배의 대상
- ↑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한울을 모셔야 한다는 동학 교리
- ↑ 노컷뉴스, "4.19 그날, 시인 신동엽도 거리에 있었다", 미상,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