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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창원최윤덕묘역.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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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1210000 창원 최윤덕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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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창원 최윤덕 묘역
 
|대표명칭=창원 최윤덕 묘역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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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Tomb of Choe Yun-deok, Changwon
 
|한자=昌原 崔潤德 墓域
 
|한자=昌原 崔潤德 墓域
 
|주소=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 산8번지
 
|주소=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 산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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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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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북면 대산리의 사리실 마을 뒷산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 초기의 무장 최윤덕(崔閏德, 1376~1445) 장군의 묘역에는 같은 형태의 묘 2기가 있는데, 앞쪽의 것이 장군의 묘이고 뒤쪽의 것은 부인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묘는 아래 부분에 잘 다듬은 큰 돌로 사각형의 받침대를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봉분을 올렸다. 장군의 묘 좌우에는 문인석 2기가 서 있다. 장군은 역시 무인으로 이름 높았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소의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1410년(태종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1419년(세종 1)에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이종무(李從茂, 1360~1425)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후에도 북방의 여진족을 평정(平定)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 공으로 정승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장군은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 여가가 있을 때면 묵은 땅에 손수 농사를 지었다. 또 장군은 남편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죽여 달라는 한 여인의 호소를 듣고 즉시 그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가른 뒤 남편의 뼈를 찾아 주었다고 한다.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는 선생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데, 경상남도 기념물 제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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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명장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갔다가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 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반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에는 궤장*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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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의 묘는 화강석으로 둘러싸인 방형 무덤으로,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헌종 12년(1846)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세운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
====초고====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에 위치한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묘이다.
 
  
최윤덕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통천(通川), 호는 임곡(霖谷), 시호는 정열(貞烈)이다. 19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세종 15년(1433)에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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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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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墓碣): 머리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이 묘의 앞쪽 동편에 세워진 묘갈(墓碣)에는 ‘세묘조배향공신좌의정정렬공최윤덕지묘배경정부인팔거도씨(世廟朝配享功臣左議政貞烈公崔潤德之墓配貞敬夫人八莒都氏)’라고 새겨져 있다. 최윤덕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 또한 이 묘갈의 뒷면에 ‘숭정기원후삼병오년오월일십세손응태근수립본통천(崇禎紀元後三丙午年五月日十世孫應台謹修立本通川)’이라고 되어 있어 헌종 12년(1846)에 10세 후손 최응태가 건립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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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tomato">마지막 문장 확인 필요.</font>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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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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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Choe Yun-deok, Changwon'''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고 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년에는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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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tomb of Choe Yun-deok (1376-1445), a renowned gener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최윤덕의 묘는 봉분 아래에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헌종 12년(1846)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건립한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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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e Yun-deok was born in Changwon to a family of military nobility. Since early childhood, he exhibited great strength and excelled in archery. There is an anecdote about him going to the mountains to feed the cattle and being attacked by a tiger, which he shot down with a single arrow. He passed the licentiate examination in 1394 and the state examination in 1410. He served as a commander in the northeast region occupied by the Jurchens. Later,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r. 1418-1450), Choe led various military operations including both the offensive on Tsushima Island to the south and the expansion north, which won him the king’s trust. Despite being a senior army officer, in 1435, he was promoted to second state councilor, the second-highest civil official position. But even after the promotion, whenever a problem loomed at the country’s border, he stepped up and served by example. For his outstanding service to the country, in 1445, right before his death, the king bestowed him with a commemorative chair and a staff, the highest honor given to an official after turning 70 years old.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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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quare base of the tomb mound is enclosed by granite stones. This type of a tomb was prevalent during the early period of Joseon. In front of the tomb stand a stone table and two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o the right is a tombstone erected in 1846 by Choe Eung-tae, a 10th-generation descendant of Choe Yun-deok. About 10 m to the northeast of Choe’s tomb is another tomb built in the same style, presumed to have belonged to his wife Lady Do.
# 분야별 자문위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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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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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 분야별 자문위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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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명장인 최윤덕(1376-1445)의 묘이다.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고 한다.”->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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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풀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1394년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1410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재위 1418-1450) 때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1435년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445년에는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를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묘는 봉분 아래에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 “최윤덕의 묘는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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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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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의 묘는 방형 무덤으로 봉분 아래쪽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1846년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건립한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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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집필]]
 
[[분류:2021 국문집필]]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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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9월 27일 (월) 01:56 기준 최신판

창원 최윤덕 묘역
Tomb of Choe Yun-deok, Changwon
창원 최윤덕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원 최윤덕 묘역
영문명칭 Tomb of Choe Yun-deok, Changwon
한자 昌原 崔潤德 墓域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 산8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
지정일 1992년 10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관리자 통천최씨종중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창원 최윤덕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전기의 명장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갔다가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 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반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에는 궤장*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묘는 화강석으로 둘러싸인 방형 무덤으로,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헌종 12년(1846)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세운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


  •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
  • 묘갈(墓碣): 머리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 마지막 문장 확인 필요.

영문

Tomb of Choe Yun-deok, Changwon

This is the tomb of Choe Yun-deok (1376-1445), a renowned gener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Choe Yun-deok was born in Changwon to a family of military nobility. Since early childhood, he exhibited great strength and excelled in archery. There is an anecdote about him going to the mountains to feed the cattle and being attacked by a tiger, which he shot down with a single arrow. He passed the licentiate examination in 1394 and the state examination in 1410. He served as a commander in the northeast region occupied by the Jurchens. Later,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r. 1418-1450), Choe led various military operations including both the offensive on Tsushima Island to the south and the expansion north, which won him the king’s trust. Despite being a senior army officer, in 1435, he was promoted to second state councilor, the second-highest civil official position. But even after the promotion, whenever a problem loomed at the country’s border, he stepped up and served by example. For his outstanding service to the country, in 1445, right before his death, the king bestowed him with a commemorative chair and a staff, the highest honor given to an official after turning 70 years old.

The square base of the tomb mound is enclosed by granite stones. This type of a tomb was prevalent during the early period of Joseon. In front of the tomb stand a stone table and two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o the right is a tombstone erected in 1846 by Choe Eung-tae, a 10th-generation descendant of Choe Yun-deok. About 10 m to the northeast of Choe’s tomb is another tomb built in the same style, presumed to have belonged to his wife Lady Do.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명장인 최윤덕(1376-1445)의 묘이다.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풀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1394년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1410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재위 1418-1450) 때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1435년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445년에는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를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묘는 방형 무덤으로 봉분 아래쪽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1846년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건립한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최윤덕 Actor 최윤덕(崔潤德,1376~1445)
통천최씨 Actor 통천최씨(通川崔氏)
창원_최윤덕_묘역 Place 창원_최윤덕_묘역
대마도정벌 Event 대마도정벌(1419)
J38-0121-0000 Heritage (경상남도_기념물_제121호)창원_최윤덕_묘역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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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arget Relation
창원_최윤덕_묘역 최윤덕 isTombOf
통천최씨 최윤덕 member
최윤덕 대마도정벌 participatesIn
창원_최윤덕_묘역 J38-0121-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