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창원 최윤덕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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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북면 대산리의 사리실 마을 뒷산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 초기의 무장 최윤덕(崔閏德, 1376~1445) 장군의 묘역에는 같은 형태의 묘 2기가 있는데, 앞쪽의 것이 장군의 묘이고 뒤쪽의 것은 부인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묘는 아래 부분에 잘 다듬은 큰 돌로 사각형의 받침대를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봉분을 올렸다. 장군의 묘 좌우에는 문인석 2기가 서 있다. 장군은 역시 무인으로 이름 높았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소의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1410년(태종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1419년(세종 1)에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이종무(李從茂, 1360~1425)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후에도 북방의 여진족을 평정(平定)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 공으로 정승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장군은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 여가가 있을 때면 묵은 땅에 손수 농사를 지었다. 또 장군은 남편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죽여 달라는 한 여인의 호소를 듣고 즉시 그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가른 뒤 남편의 뼈를 찾아 주었다고 한다.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는 선생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데, 경상남도 기념물 제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에 위치한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묘이다.

최윤덕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통천(通川), 호는 임곡(霖谷), 시호는 정열(貞烈)이다. 19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세종 15년(1433)에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이 묘의 앞쪽 동편에 세워진 묘갈(墓碣)에는 ‘세묘조배향공신좌의정정렬공최윤덕지묘배경정부인팔거도씨(世廟朝配享功臣左議政貞烈公崔潤德之墓配貞敬夫人八莒都氏)’라고 새겨져 있다. 최윤덕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 또한 이 묘갈의 뒷면에 ‘숭정기원후삼병오년오월일십세손응태근수립본통천(崇禎紀元後三丙午年五月日十世孫應台謹修立本通川)’이라고 되어 있어 헌종 12년(1846)에 10세 후손 최응태가 건립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차 수정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묘이다.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고 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년에는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묘는 봉분 아래에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헌종 12년(1846)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건립한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없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고 한다.”->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 “최윤덕의 묘는 봉분 아래에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 “최윤덕의 묘는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북면 대산리의 사리실 마을 뒷산에 자리잡고 있는 이 무덤은 조선 초기의 무장 최윤덕(崔閏德, 1376~1445) 장군의 묘역이다. 앞쪽의 것이 장군의 묘이고 뒤쪽의 것은 부인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묘는 아래 부분에 잘 다듬은 큰 돌로 사각형의 받침대를 2단으로 만든 호석이 있고 그 위에 봉분을 올렸다.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장군의 묘앞에는 상석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 2기가 서 있다. 봉분 오른쪽에는 헌종 12년(1846)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건립한 묘갈이 있다. 위에는 어머니의 묘소가 있다.
      최윤덕 장군은
      창원 출신으로 역시 무인으로 이름 높았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소의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태종 10년(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세종1년(1419)에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이종무(李從茂, 1360~1425)와 함께 대마도(對馬島 : 쓰시마)를 정벌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년에는 궤장(几杖 :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2차 수정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묘이다.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는 일화가 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후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서는 모범을 보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에는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묘는 화강석으로 호석을 두른 방형 무덤으로,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한 쌍의 문인석이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헌종 12년(1846) 최윤덕의 10세손 최응태가 건립한 묘갈이 있다. 최윤덕의 묘에서 동북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부인 도씨의 묘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