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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사 사적비는 비 받침인 귀부에서는 보기 드문 주역에서 나타내는 건곤(乾坤)의 팔괘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은 동종 몸신에 팔괘가 등장한 사역 내의 ‘고흥 능가사 동종(1698년)’에서 영향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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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비는 조선시대의 양반 지배층들에게는 사회생활이나 관계에 진출할 때 문벌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족보는 양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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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에 보학(譜學)이 크게 성행하고 그 영향으로 유가와 불가에서 기적비(紀蹟碑)나 사적비(事蹟碑) 등이 활발하게 건립된다. 오늘날 전하는 사적비는 사찰과 관련되는 것이 많은데 개창비(開創碑)·창건비·중창비·중수비·중흥비 등 사찰의 발자취(寺跡)에 관련된 사찰비가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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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사 사적비는 능진당 뒤쪽 사역 최남단에 위치한다. 능가사 사적비는 팔괘문이 둘러진 귀부와 장방형의 이수를 갖추었다. 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새졌으며 모두 2,718자이다. 전액은 비 상단에 횡서로 ‘흥양팔영산능가사사적비(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 비제는 비 왼쪽에서 종서로 ‘조선국전라도흥양현팔영산능가사사적비명병서(朝鮮國全羅道興陽縣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라고 오목새김으로 써놓았다. 본문에는 절의 발자취를, 음기에는 비 건립 내력과 참여 인물들의 이름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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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오수채(吳遂采: 1692~1759년)가 비문을 짓고 사헌부 대사헌 조명교(曹命敎: 1687~1753년)가 비문과 제액을 함께 썼다. 음기에 비를 건립한 내력과 글을 얻은 전말 등은 능가사에서 출가하고 송광사에서 입적한 약탄(若坦: 1668~1754년)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썼다. 제액은 전서체, 비문 전면은 약간의 흘림이 있는 해서체이며 음기는 단정한 해서체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은 63자이고 음기는 31행으로 1행이 80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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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따르면 이 절은 처음에 보현사로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나 이후 승려와 대중들이 힘을 모아 사찰을 재건하여 20여 동의 건물을 짓는 등 번성하게 되었다. 능가사 승려 투명(透明)이 사찰의 번성한 모습이 다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여 비를 세우고자 하였고 오수채에게 여러 차례 부탁하여 비문을 짓는다고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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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龜趺)의 머리는 용머리화 되었으며 목이 짧고 입안에는 여의주를 물었다. 귀부의 등 끝에는 팔괘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석의 머릿돌(螭首) 아래에는 앙련(仰蓮)·운룡문(雲龍文)·화문(花紋) 등이 새겨 꾸몄으며 위에는 여러 마리 용들이 어우러져 꿈틀댄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수정 국문===
 
===수정 국문===

2021년 4월 29일 (목) 14:36 판


고흥 능가사 사적비
고흥 능가사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고흥 능가사 사적비
한자 高興 楞伽寺 事蹟碑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팔봉길 21 능가사 비각
지정번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지정일 1978년 9월 22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고흥 능가사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능가사 사적비는 비 받침인 귀부에서는 보기 드문 주역에서 나타내는 건곤(乾坤)의 팔괘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은 동종 몸신에 팔괘가 등장한 사역 내의 ‘고흥 능가사 동종(1698년)’에서 영향 받았을 것이다.

사적비는 조선시대의 양반 지배층들에게는 사회생활이나 관계에 진출할 때 문벌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족보는 양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에 보학(譜學)이 크게 성행하고 그 영향으로 유가와 불가에서 기적비(紀蹟碑)나 사적비(事蹟碑) 등이 활발하게 건립된다. 오늘날 전하는 사적비는 사찰과 관련되는 것이 많은데 개창비(開創碑)·창건비·중창비·중수비·중흥비 등 사찰의 발자취(寺跡)에 관련된 사찰비가 여기에 속한다.

능가사 사적비는 능진당 뒤쪽 사역 최남단에 위치한다. 능가사 사적비는 팔괘문이 둘러진 귀부와 장방형의 이수를 갖추었다. 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새졌으며 모두 2,718자이다. 전액은 비 상단에 횡서로 ‘흥양팔영산능가사사적비(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 비제는 비 왼쪽에서 종서로 ‘조선국전라도흥양현팔영산능가사사적비명병서(朝鮮國全羅道興陽縣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라고 오목새김으로 써놓았다. 본문에는 절의 발자취를, 음기에는 비 건립 내력과 참여 인물들의 이름으로 구성되었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오수채(吳遂采: 1692~1759년)가 비문을 짓고 사헌부 대사헌 조명교(曹命敎: 1687~1753년)가 비문과 제액을 함께 썼다. 음기에 비를 건립한 내력과 글을 얻은 전말 등은 능가사에서 출가하고 송광사에서 입적한 약탄(若坦: 1668~1754년)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썼다. 제액은 전서체, 비문 전면은 약간의 흘림이 있는 해서체이며 음기는 단정한 해서체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은 63자이고 음기는 31행으로 1행이 80자이다.

비문에 따르면 이 절은 처음에 보현사로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나 이후 승려와 대중들이 힘을 모아 사찰을 재건하여 20여 동의 건물을 짓는 등 번성하게 되었다. 능가사 승려 투명(透明)이 사찰의 번성한 모습이 다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여 비를 세우고자 하였고 오수채에게 여러 차례 부탁하여 비문을 짓는다고 기술한다.

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龜趺)의 머리는 용머리화 되었으며 목이 짧고 입안에는 여의주를 물었다. 귀부의 등 끝에는 팔괘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석의 머릿돌(螭首) 아래에는 앙련(仰蓮)·운룡문(雲龍文)·화문(花紋) 등이 새겨 꾸몄으며 위에는 여러 마리 용들이 어우러져 꿈틀댄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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