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능가사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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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능가사 사적비
Stele for the Construction of Neunggasa Temple, Goheung
고흥 능가사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고흥 능가사 사적비
영문명칭 Stele for the Construction of Neunggasa Temple, Goheung
한자 高興 楞伽寺 事蹟碑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팔봉길 21 능가사 비각
지정번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지정일 1978년 9월 22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고흥 능가사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능가사 사적비는 능가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영조 26년(1750)에 세운 비석이다. 사적비란 장소나 인물 등과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

등에 팔괘(八卦)를 새긴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내용과, 정현대사 벽천(正玄大師 碧川)이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벽천이 꿈에서 산 남쪽의 옛 절터를 발견한 후 인조 22년(1644)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비문은 오수채(吳遂采, 1692~1759)가 지었으며, 조명교(曺命敎, 1687~1753)가 글씨를 썼다.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적었다. 뒷면의 비문은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若坦, 1668~1754)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글씨를 썼다.

영문

Stele for the Construction of Neunggasa Temple, Goheung

This stele erected in 1750 records information on the establishment and reconstruction of Neunggasa Temple. It consists of a tortoise-shaped pedestal, a body stone, and a rectangular capstone. The eight diagrams are carved over the back of the tortoise pedestal, and the capstone is decorated with twin dragon and cloud designs.

The front of the stele bears an inscription composed by civil official O Su-chae (1692-1759) and calligraphed by the civil official and calligrapher Jo Myeong-gyo (1687-1753). According to the inscription, the eminent Buddhist monk Ado founded a temple named Bohyeonsa here in 419, but it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Monk Byeokcheon, who was practicing meditation on Jirisan Mountain, is said to have rediscovered this temple site in a dream, and in 1644, he rebuilt the temple and renamed it Neunggasa.

The back of the stele bears an inscription composed by the eminent monk Yaktan (1668-1754), who became a monk at Neunggasa Temple, which records the reason and the process of erecting this stele.

영문 해설 내용

이 사적비는 능가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1750년에 세웠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의 거북 등에는 팔괘를 새기고,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과 구름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앞면의 비문은 문신 오수채(1692-1759)가 짓고, 문신이자 서화가인 조명교(1687-1753)가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승려 아도화상이 419년에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으나,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정현대사 벽천이 꿈에서 이 옛 절터를 발견하였고, 1644년 이 절터에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뒷면의 비문은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1668-1754)이 지었으며,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기록하였다.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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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_능가사_사적비 Object 고흥_능가사_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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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6-0070-0000 Heritage (전라남도_유형문화재_제70호)_고흥_능가사_사적비
보현사 Place 보현사
임진왜란 Event 임진왜란(1592)
아도화상 Actor 아도화상(阿度和尙)
정현대사 Actor 정현대사(正玄大師)
오수채 Actor 오수채(吳遂采, 1692-1759)
조명교 Actor 조명교(曺命敎, 1687-1753)
약탄 Actor 약탄(若坦, 1668-1754)
김사국 Actor 김사국(金師國)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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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_능가사_사적비 약탄 writer
고흥_능가사_사적비 조명교 calligrapher
고흥_능가사_사적비 김사국 calligrapher

참고자료

  • 지자체 제공 문안 → 능가사 사적비는 비 받침인 귀부에서는 보기 드문 주역에서 나타내는 건곤(乾坤)의 팔괘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은 동종 몸신에 팔괘가 등장한 사역 내의 ‘고흥 능가사 동종(1698년)’에서 영향 받았을 것이다. 능가사 사적비는 능진당 뒤쪽 사역 최남단에 위치한다. 능가사 사적비는 팔괘문이 둘러진 귀부와 장방형의 이수를 갖추었다. 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새졌으며 모두 2,718자이다. 전액은 비 상단에 횡서로 ‘흥양팔영산능가사사적비(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 비제는 비 왼쪽에서 종서로 ‘조선국전라도흥양현팔영산능가사사적비명병서(朝鮮國全羅道興陽縣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라고 오목새김으로 써놓았다. 본문에는 절의 발자취를, 음기에는 비 건립 내력과 참여 인물들의 이름으로 구성되었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오수채(吳遂采: 1692~1759년)가 비문을 짓고 사헌부 대사헌 조명교(曹命敎: 1687~1753년)가 비문과 제액을 함께 썼다. 음기에 비를 건립한 내력과 글을 얻은 전말 등은 능가사에서 출가하고 송광사에서 입적한 약탄(若坦: 1668~1754년)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썼다. 제액은 전서체, 비문 전면은 약간의 흘림이 있는 해서체이며 음기는 단정한 해서체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은 63자이고 음기는 31행으로 1행이 80자이다. 비문에 따르면 이 절은 처음에 보현사로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나 이후 승려와 대중들이 힘을 모아 사찰을 재건하여 20여 동의 건물을 짓는 등 번성하게 되었다. 능가사 승려 투명(透明)이 사찰의 번성한 모습이 다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여 비를 세우고자 하였고 오수채에게 여러 차례 부탁하여 비문을 짓는다고 기술한다. 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龜趺)의 머리는 용머리화 되었으며 목이 짧고 입안에는 여의주를 물었다. 귀부의 등 끝에는 팔괘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석의 머릿돌(螭首) 아래에는 앙련(仰蓮)·운룡문(雲龍文)·화문(花紋) 등이 새겨 꾸몄으며 위에는 여러 마리 용들이 어우러져 꿈틀댄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 능가사 연혁, 능가사 홈페이지 https://www.neunggasa.org/5 → 이 중 사적비는 1726년(영조 2)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 능가사 성보문화재, 능가사 홈페이지 소장 문화재 https://www.neunggasa.org/category/%EB%8A%A5%EA%B0%80%EC%82%AC/%EC%84%B1%EB%B3%B4%EB%AC%B8%ED%99%94%EC%9E%AC →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 표기 ‘숭정기원후재경오(崇禎紀元后再庚午)’는 1690년으로 알려 졌는데, 숭정 재위 기간의 경오(1630년)는 포함하지 않고 그 뒤로 이어지는 두번째 경오로 보아야 하고, 비문 찬자, 서자, 관련 인물의 활동연대와 비교하여 보면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 고흥 능가사 사적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113600700000 →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능가사의 창건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능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 표기 ‘숭정기원후재경오(崇禎紀元后再庚午)’는 1690년으로 알려 졌는데, 숭정 재위 기간의 경오(1630년)는 포함하지 않고 그 뒤로 이어지는 두번째 경오로 보아야 하고, 비문 찬자, 서자, 관련 인물의 활동연대와 비교하여 보면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 오수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374
  • 조명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