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흥 능가사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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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사적비란 절의 내력을 적어놓은 비를 말한다. 사적비에 따르면 신라 눌지왕 원년인 417년에 아도화상(我道和尙)이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처음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호 벽천)가 여름에 수행하다가 꿈에 산의 남쪽에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 요사채, 불상, 탱화, 종각, 목어각 등 불사를 하면서 능가사로 다시 일으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비는 방형(사각형)에 가까운 자연석 좌대 위에 귀부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비석의 지붕)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비이다. 비문에 따르면 능가사는 원래 보현사란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으나, 지리지 등에는 별개의 사찰로 각각 기록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능가사(楞伽寺)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1750년에 세워졌다.

등에 팔괘(八卦)가 새겨진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사실과, 정현대사(正玄大師) 벽천(碧川)의 중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벽천이 꿈에서 산 남쪽의 옛 절터를 발견한 후 조선 인조 22년(1644) 지금의 자리에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비문은 오수채(吳遂采, 1692-1759)가 지었으며, 조명교(曺命敎, 1687-1753)가 글씨를 썼다.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적었다. 뒷면의 비문은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若坦, 1668-1754)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글씨를 썼다.

  • 사적비 건립 시기 - 지자체 제공 자료 기준 작성 (자료별 차이 있으므로 확인 필요함 – 능가사 홈페이지 연혁 소개 중에는 1726년으로, 성보문화재 설명 중에는 1750년(문화재청 설명 동일)으로 되어 있으며, 민백에는 1690년(‘경오년’기준 산출)으로 되어 있음.)

1차 수정

능가사 사적비는 능가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영조 26년(1750)에 세운 비석이다.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

등에 팔괘(八卦)가 새겨진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사실과, 정현대사 벽천(正玄大師 碧川)이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벽천이 꿈에서 산 남쪽의 옛 절터를 발견한 후 인조 22년(1644)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비문은 오수채(吳遂采, 1692~1759)가 지었으며, 조명교(曺命敎, 1687~1753)가 글씨를 썼다.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적었다. 뒷면의 비문은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若坦, 1668~1754)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글씨를 썼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 사적비란 장소나 인물 등과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 팔괘가 새겨진 → 팔괘를 새긴
    • 사찰을 지었다는 사실 →사실로 확정할 수 없으므로, '사찰을 지었다는 전승' 정도로 수정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자문의견 탑재 오류(산청 척화비 자문 내용)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사적비의 구성 단위가 잘 드러나도록 문장 추가 : 등에 팔괘(八卦)가 새겨진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 사적비는 세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등에 팔괘(八卦)가 새겨진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 등이다.

2차 수정

능가사 사적비는 능가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영조 26년(1750)에 세운 비석이다. 사적비란 장소나 인물 등과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

등에 팔괘(八卦)를 새긴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내용과, 정현대사 벽천(正玄大師 碧川)이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벽천이 꿈에서 산 남쪽의 옛 절터를 발견한 후 인조 22년(1644)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비문은 오수채(吳遂采, 1692~1759)가 지었으며, 조명교(曺命敎, 1687~1753)가 글씨를 썼다.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적었다. 뒷면의 비문은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若坦, 1668~1754)이 짓고, 김사국(金師國)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