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평 자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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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김상순(金相純, 1842~1912)과 김상린(金相麟, 1853~1917) 형제가 머물렀던 정자이다. 형제는 광산김씨로 한말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7),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등과 교유했다. 정자의 이름 자형(紫荊)은 박태기나무로 형제의 우애를 상징한다.

자형정의 최초 건립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교유한 인사들의 여러 기문과 현판, 그리고 1901년 김상순이 지은 시 ‘자영정원운(紫荊亭原韻)’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10년 김상순의 손자(재욱, 재훈)와 김상린의 아들(기대, 기철)이 중수한 것이다. 기우만의 자형정기(紫荊亭記)에 ‘1910년 늦은 봄 자형화가 만발할 때 낙성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자형정은 호남의 명유(名儒)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손자이자 의병장이었던 기우만, 오계수(吳繼洙, 1843~1915), 윤용구(尹用求, 1853~1939), 이병수(李炳壽, 1855~1941) 등 호남에 연고가 있는 항일우국지사들이 모여 강학하고 토론하던 교류처의 역할을 담당했다.

자형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 방을 두었다. 방 양쪽 측면의 들문을 올리면 대청과 통하여 공간이 확장된다. 건물의 전면과 측면에는 각각 2칸의 눈썹지붕을 덧대어 회랑(回廊)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1차 수정

광산김씨 가문의 김상순(金相純, 1842~1912)과 김상린(金相麟, 1853~1917) 형제가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 ‘자형(紫荊)’은 박태기나무를 가리키며,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자형정이 있는 월계리는 18세기 말 이후로 광산김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형제는 최익현(崔益鉉, 1833~1907),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등 당시 전라도 지역에 연고가 있는 항일우국지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자형정은 이들이 모여 강학하고 토론하던 교류처의 역할을 담당했다.

자형정의 최초 건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건물은 김상순의 손자와 김상린의 아들이 1910년에 중수한 것이다. 중앙에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으며, 방의 문을 들어 올리면 방과 마루가 연결되어 공간이 크게 확장된다. 건물의 앞면과 옆면에는 지붕을 이중으로 덧대어 회랑(回廊)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자형정의 최초 건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자형정은 190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자형정이 있는 -> 자형정(紫荊亭)이 있는 로 수정 한자 표기
    • 회랑(回廊)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 회랑(回廊)형식의 공간을 만들었다. 로 수정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자형정은 이들이 모여 강학하고 토론하던 교류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했다.

2차 수정

광산김씨 가문의 김상순(金相純, 1842~1912)과 김상린(金相麟, 1853~1917) 형제가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 ‘자형(紫荊)’은 박태기나무를 가리키며,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자형정이 있는 월계리는 18세기 말 이후로 광산김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형제는 최익현(崔益鉉, 1833~1907),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등 당시 전라도 지역에 연고가 있는 항일우국지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자형정은 이들이 모여 강학하고 토론하던 교류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했다.

자형정은 190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건물은 김상순의 손자와 김상린의 아들이 1910년에 중수한 것이다. 중앙에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으며, 방의 문을 들어 올리면 방과 마루가 연결되어 공간이 크게 확장된다. 건물의 앞면과 옆면에는 지붕을 이중으로 덧대어 회랑(回廊) 형식의 공간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