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거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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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고려 말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선생이 처음 터를 잡은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인 진사 전재학, 전계진 등이 건립 하였으며 1901년 중수가 있었다.

거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내부에는 벽체(뒷벽)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을 1칸 두고 있으며, 겹처마에 합각지붕 형식으로 하천내의 자연암반 위에 조성된 정자 건물로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진사(進士) 전재구(全在球, 1814~?)가 안음(安陰)의 3동(靑溪, 尋眞, 花林) 중의 하나인 화림동에 건립한 정자이다. 전재구의 본관(本官)은 정선전씨(旌善全氏)이고 거주지는 안의(安義)이다. 정선전씨들은 낙동강의 서쪽에 해당하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 정온(鄭蘊, 1569~1641)의 문인인 전시서(全時敍) 때 부터 자리를 잡은 이후로 세거해왔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누정은 누정을 포괄하는 지역에 대한 영향권 위에서 세워질 수 있다고 보는데, 거연정은 안의 정선전씨의 향촌 위치가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전시서가 1640년경 여말선초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전오륜(全五倫)을 제향하기 위해 서산서원(西山書院)을 건립하였고 그 옆에 억새로 만든 누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1868년 서산서원이 훼철되자, 훼철된 서산서원의 목재로 전시서의 7대손인 진사 전재학, 전계진 등이 재건립하였고 이후 1901년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거연정 기문을 지은 조선후기의 학자 임헌회(任憲晦, 1811~1876)는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安義三洞)이 가장 빼어나고, 그중에서도 화림동(花林洞)이 최고이고,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으뜸”이라고 밝힌 것처럼 화림동의 자연경관과 정자의 조화가 볼만한다.

1차 수정

거연정은 정선전씨 문중에서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인 ‘거연(居然)’은 사람이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에 동화되어 편하게 사는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문신인 전시서(全時敍)가 7대조인 전오륜(全五倫)을 추모하기 위해 1640년 경 서산서원을 건립하면서 그 옆에 억새로 만든 누정을 지었다고 한다. 전오륜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은거한 72인 중 한 명이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서산서원이 훼철되자, 전시서의 7세손인 전재학(全在學) 등이 훼철된 서산서원의 목재를 사용하여 1872년 지금의 거연정을 건립하였고, 이후 1901년 중수하였다.

거연정 내부에 걸린 여러 현판 중에는 조선 후기의 학자 임헌회(任憲晦, 1811~1876)가 쓴 「거연정기(居然亭記)」가 있는데,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安義三洞,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중에서도 화림동이 최고이며,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으뜸”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거연정은 정선전씨 문중에서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인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정사잡영(精舍雜詠) 중에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그렇게 나와 샘과 돌이 같이 사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이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에 동화되어 편하게 사는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뭔가 의미를 담아서 굳이 어려운 단어인 ‘누정’이라는 선택한 것 같은데 ‘누정’이라는 단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써주세요.
    • ‘훼철’이라는 단어도 풀어서 쉽게 써주세요.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차 수정

거연정은 정선전씨 문중에서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인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중에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그렇게 나와 샘과 돌이 같이 사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이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에 동화되어 편하게 사는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문신인 전시서(全時敍)가 7대조인 전오륜(全五倫)을 추모하기 위해 1640년 무렵 서산서원을 건립하면서 그 옆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전오륜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은거한 72인 중 한 명이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서산서원이 철거되자, 전시서의 7세손인 전재학(全在學) 등이 서산서원의 목재를 사용하여 1872년 지금의 거연정을 건립하였고 이후 1901년 중수하였다.

거연정 내부에 걸린 여러 현판 중에는 조선 후기의 학자 임헌회(任憲晦, 1811~1876)가 쓴 「거연정기(居然亭記)」가 있는데,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安義三洞,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중에서도 화림동이 최고이며,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으뜸”이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