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봉황사 대웅전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원래 황산사의 대웅전이었으나 언제 개명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이 있으나 예전에는 극락전, 범종각, 만세루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선덕여왕 13(644)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북쪽 텃밭에 원래의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내의 건물 2동은 후대에 옮겨 세운 것으로 북향의 급경사지에 세워져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산곡간의 법당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내부의 3칸 후면의 벽에 불상을 설치하였다. 기둥의 앞면과 뒷면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이 특이하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의 단청은 봉황이 하였다고 한다. 단청을 할 때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고 단청을 하였으나 전면을 마친 후 뒷면을 하는데 사람들이 몰래 쳐다보자 일을 다 마치지 않고 날아 가버렸다고 한다. 현재 후면은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수정 국문
초고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건물이다.
봉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그 중 대웅전은 17세기말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황산사(黃山寺)로 불린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법당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전면 기둥은 중간의 직경이 크고 위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강한 배흘림이다. 내부 단청은 17~18세기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용, 금박으로 정교하고 도드라지게 그려진 연화당초문, 보상화당초문 등은 재건 당시의 상태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특히 천정에 그려진 봉황은 연꽃을 입에 물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모습으로 봉황사라는 사찰의 유래와도 관련된 독특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둥 후면에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데 이에 대한 전설이 있다. 봉황이 단청을 만들었는데 작업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전면을 마친 후 뒷면을 하는 도중 사람들이 몰래 쳐다보자 일을 다 마치지 않고 날아 가버렸다고 한다.
1차 수정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으로,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대웅전은 ‘세상을 밝히는 위대한 영웅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봉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웅전은 17세기 후반 무렵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법당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전면 기둥은 중간의 직경이 크고 위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배흘림기둥인데, 조선 후기의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이다.
대웅전의 외부 단청은 근래에 다시 칠한 것이지만, 내부 단청은 17~18세기의 상태를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다. 우물반자에 그려진 용, 금박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연화당초문과 보상화당초문 등은 당시 단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웅전 뒷면에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데 이에 대한 전설이 있다. 봉황사 대웅전의 단청은 봉황이 칠했다고 하며, 작업하는 동안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앞면의 단청을 마친 후 뒷면을 하는 도중 사람들이 몰래 쳐다보자, 일을 다 마치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