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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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집의 본채는 조선 숙종(肅宗) 30년(1704)에 좌승지(左承旨) 이후식(李後植)이 지었고, 북정(北亭)은 영조(英祖) 51년(1775)에 진사 이종주(李宗周)가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정자와 연못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중에 방앗간채, 사랑채, 외양간채가 더 지어졌다. 사랑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안채의 동쪽에는 3칸 크기의 사당이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세워졌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곡에 흐르는 물을 건물과 잘 조화시킨 사대부 가옥의 전통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고성이씨 탑동파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고성이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황(李璜)이고, 고성이씨의 안동 입향조는 12세 이증(李增, 1419~1480)이다. 이증의 아들 이명(李洺)이 임청각을 지은 뒤 고성이씨 후손들이 법흥동 일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명의 4세손 이적(李適)이 분파하면서 탑동파가 시작되었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법흥사가 있던 마을이므로 법흥동이라 하였고, 법흥사에 속해있던 전탑이 종택 앞에 남아 있어 이 문중은 탑동파라 불렸다.

탑동파 종택은 이적의 증손인 이후식(李後植, 1653~1714)이 1685년에 안채를 세우면서 짓기 시작하였다. 이어 사랑채를 건립하다 세상을 떠나자, 그의 손자 이원미(李元美, 1690~1765)가 사랑채인 정우재(淨友齋)와 별당인 영모당(永慕堂)을 지어 완성하였다. 안채에서 뒤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북정(北亭)이라는 정자는 1775년에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집 앞으로 중앙선이 놓이면서 풍경이 일부 퇴색되었지만, 이 종택은 주변 자연환경과 전통 건물을 잘 조화시킨 저택이다. 안채, 사랑채, 별당, 사당 등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가옥의 구조와 건축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전통 주택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