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무실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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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인조(仁祖) 때 류성(柳城)의 부인인 의성김씨의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김씨는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딸이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여동생으로 24세에 남편이 죽자 손수 머리를 자르고 3년간 무덤을 지키다가,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그 후 인조 13년(1635)에 나라에서 열녀비(烈女碑)를 내렸다.

이 건물은 단칸이며 사각기둥을 세운 홑처마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을 하지 않고 별다른 장식이 없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 곳으로 이건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유성(柳城)의 부인인 의성김씨의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각이다.

김씨는 청계(靑溪) 김진(金璡,1500~1580)의 딸이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여동생이다.

24세에 남편이 죽자 머리카락을 자르고 3년간 무덤을 지키다가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의성김씨의 열행을 높이 평가하여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나라에서 정려각이 건립되었고,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터로 옮겨 세웠다. 의성김씨의 두 아들 유복기(柳復起,1555~1617), 유복립(柳復立, 1558~1593)은 무실의 가계를 이어 오늘날의 ‘무실류씨’를 있게 하였다.

사각기둥의 단칸건물이며 서까래로만 된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고 별다른 장식이 없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안에 있는 비석에는 ‘절부고유학유성처문소김씨지각(節婦故幼學柳城妻聞韶金氏之閣)’이라고 새겨져 있다


※ 성씨 柳의 한글표기를 ‘유’로 통일했음. 논의가 필요함.
※ 의성김씨와 유성의 생몰년 확인불가

초고 수정

이 정려각은 류성(柳城, 1533~1560)의 부인 김옥정(金玉貞, 1536~1563)의 정절(貞節)을 기리며 내려진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김옥정은 의성김씨로, 조선시대의 학자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딸이다. 그녀의 남편 류성은 19세 때 김옥정과 결혼하면서 1550년 무렵 의성김씨의 집성촌인 천전리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되어 이 마을의 전주류씨(全州柳氏) 입향조가 되었으나, 28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김씨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삼년상을 마친 후 어린 두 아들을 동생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 맡긴 후 단식하다가 자결하였다.

이후 그녀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조정에서 조선 인조 13년(1635) 정려(旌閭)를 내리고 비석과 정려각을 함께 세우도록 했다.

건물은 단청이나 별다른 장식이 없는 작은 규모로,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안에 있는 비석의 앞면에는 ‘절부고유학유성처문소김씨지각(節婦故幼學柳城妻聞韶金氏之閣)’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녀의 언행이 기록되어 있다.

전주류씨 집성촌인 안동 임동면 무실마을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 의성김씨의 두 아들 류복기(柳復起,1555~1617), 류복립(柳復立, 1558~1593)은 가계를 이어 오늘날의 ‘무실류씨’가 있게 하였다.
  • 그녀의 열행은 류성의 후손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의 종가에 전하는 「가세영언(家世永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차 수정

무실 정려각은 류성(柳城, 1533~1560)의 부인 김옥정(金玉貞, 1536~1563)의 정절(貞節)을 기리는 정려를 모시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웠다. 조선시대에는 효자, 충신,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현판을 달아 정려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김옥정은 조선시대의 학자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딸이며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누나이다. 남편 류성이 28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어린 두 아들을 김성일에게 맡기고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이후 그녀의 행적이 널리 알려져, 인조 13년(1635)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비석과 정려각을 함께 세우도록 했다.

정려각은 단청이나 별다른 장식이 없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며,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