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농암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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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비는 조선 명종(明宗) 20년(1566) 2월에 세워진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신도비이다. 농암은 인제현감(麟蹄縣監)을 지낸 이흠(李欽)의 아들로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시호(諡號)는 효절(孝節)이다.

비신의 높이는 1.9m이며 폭은 0.84m이다. 재질은 대리석으로 용모양의 비머리(螭首) 없이 귀부(龜趺) 위에 비신만 얹혀져 있다.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는 규비 형식이다. 비문은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지었으며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썼다. 이 비 아래에 자운재사(紫雲齋舍)가 있어서 농암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를 기리기 위해 조선 조선 명종 20년(1566)에 세워졌다.

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시조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로만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 대신 몸돌의 윗부분을 반원형으로 다듬었다. 비문은 홍섬(洪暹, 1504-1585)이 지었고, 글씨는 송인(宋寅, 1517-1584)이 썼다. 몸돌의 크기는 높이 1.9.m, 너비 0.84m이다.

원래 신남리에 위치한 이현보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2006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 분강서원 서쪽에 있는 신도비각에 자리하고 있다.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농암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를 기리기 위해 명종 20년(1566)에 세워졌다. 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신도비는 원래 신남리에 위치한 이현보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2006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은 따로 얹지 않고 대신 몸돌의 윗부분을 반원형으로 다듬었다. 비문은 홍섬(洪暹, 1504~1585)이 지었고, 글씨는 송인(宋寅, 1517~1584)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