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천 청암사 아미타불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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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청암사 육화료(六和寮)에 후불탱으로 걸려있는 이 불화는 극락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과 주변 권속들을 묘사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공덕을 기리고 그의 이름을 염(念)하는 모든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조선 정조 14년(1790)에 제한(濟閑)을 비롯한 7명의 화승(畵僧)이 직지사 내원암에서 제작한 사실이 화기(畵記)에 기록되어 있다. 삼베 바탕에 검은색 안료를 칠한 후 각 존상의 몸을 금색으로 채색하였으며, 불상이 입은 옷에 사용된 다양한 문양 장식과 옷 주름은 금을 덧입힌 선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였다.

화면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연꽃 대좌 위에 앉아있다. 왼손은 배꼽 근처에 두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올렸으며,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서 있다. 보관을 쓴 관음보살은 손에 정병(淨甁)을 들었고, 승려의 모습을 한 지장보살은 보주(寶珠)와 지팡이를 들었다.

아미타불의 두광(頭光) 좌우에 부처의 여러 제자 중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이 합장을 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고, 화면 상단 양쪽 끝에는 시방불 10위가 대칭을 이루며 그려져 있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184㎝, 가로 211.4㎝이다.


  • 수화승 제한(濟閑)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사이에 김천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김천 직지사 괘불도(보물 제2026호) 제작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직지사 괘불도의 제작시기는 1803년이므로, 아미타불회도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 청암사는 신라의 고승 도선국사가 헌앙왕 3년(859)에 창건했다고 하며, 여러 차례의 소실과 재건이 반복되었다. 청암사 극락전은 조선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외가가 있는 김천으로 내려왔을 때 3년간 머무른 곳이라고 한다. 1987년부터 비구니 승가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5년까지 14년에 걸쳐 전 도량을 보수했다고 한다.
  • 불화가 봉안되어 있는 곳은 민백에‘육화료 큰 방’으로 되어 있는데, 육화료는 비구 스님들의 수행 공간으로 쓰여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어 실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없음 / 육화료는 청암사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청암사 승가대학의 중심건물인 대방채로 쓰인다. 육화(六和)는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깨우쳐야 하는 여섯 가지 법으로, 신(身), 구(口), 의(義), 계(戒), 견(見), 이(利)의 화합을 통한 승가의 실천내용을 말한다. 지금의 건물은 2004년에 보수된 것이다.

1차 수정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청암사 육화료에 걸려있는 이 불화는 극락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장면을 그렸다. 아미타불은 죽은 이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그림 위쪽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이 불화는 조선 정조 14년(1790)에 제한(濟閑)을 비롯한 7명의 승려 화가가 직지사 내원암에서 제작하였다. 삼베 바탕에 검은색 안료를 칠한 후 각 존상의 몸을 금색으로 칠하였으며, 불상이 입은 옷에 사용된 다양한 문양 장식과 옷 주름은 금박을 덧입힌 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면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고, 아미타불의 양옆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서 있다. 보관을 쓴 관음보살은 가장 깨끗한 물을 담는다고 하는 정병을 손에 들었고, 승려의 모습을 한 지장보살은 보주와 지팡이를 들었다. 아미타불과 두 보살 뒤에는 부처의 여러 제자 중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이 합장을 한 모습으로 서 있다. 화면 위쪽의 양쪽 모서리에는 시방불 10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간략한 구성을 유려한 필선으로 정교하게 묘사한 작품이며, 검은 바탕에 금박 안료를 풍부하게 사용한 희귀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