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주 신관리 석실고분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무덤은 1967년에 발견된 백제시대의 무덤이다. 1호 무덤과 2호 무덤의 구조양식과 규모는 거의 같다. 평평한 판돌 2개를 “ㅅ”자형으로 서로 기대어 천장을 만든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도굴된 상태에서 발견이 되어 부장품은 나오지 않았으나, 백제 중기의 특이한 양식으로 당시 무덤 축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신관리 석실고분은 예전 이곳이 신관리였기 때문에 붙은 명칭으로 백제시대의 무덤이다. 이곳이 원래 신관리의 ‘시목동(柿木洞)’이었으므로 ‘시목동 고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무덤은 1966년 공주대학교 신축부지공사 중에 백제 토기가 확인된 것을 계기로 발견되었고, 이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석실고분은 돌방무덤으로 불린다. 합장이 가능한 형태의 무덤으로 백제의 다양한 무덤 양식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으로 꼽힌다.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고구려와 신라도 처음에는 다른 무덤 양식을 사용하다가 6세기 중엽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삼국의 무덤 양식이 모두 돌방무덤 양식으로 통일된다. 이 무덤의 주인은 알 수 없지만, 무덤의 양식으로 보아 5세기에서 6세기 사이로 추정된다. 2기로 구성되어 있고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규모와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널방은 여러 장의 큰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널길은 남벽 중앙에 붙어 있다. 천정은 역시 판석을 동서 양 벽에서 맞배식으로 올려놓아 전체적으로 널방의 단면이 5각형을 띠고 있다. 이것은 백제 돌방무덤 중에서도 특이한 천정구조이다. 널길과 남벽 사이에는 문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문틀의 외부에서 널방을 막는 문짝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에 위치한 1호분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나 2호분은 훼손이 심하고 매몰되어 있어 지표면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도굴된 상태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웅진백제시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당시 무덤 축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 기존 안내문에 “이 무덤은 1967년에 발견된 백제시대의 무덤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참고문헌과 민백, 향문, 관련 기사에는 모두 1966년으로 되어 있다.
1차 수정
신관리 석실고분은 5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무덤이다. 2기로 구성되어 있고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규모와 구조가 서로 거의 동일하다. 1966년 공주대학교 신축부지공사 중에 백제 토기가 발견되면서 확인되었고, 이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석실고분은 돌방무덤으로 불리며, 백제의 다양한 무덤 양식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으로 꼽힌다.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고구려와 신라도 처음에는 다른 무덤 양식을 사용하다가 6세기 중엽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수용하였다. 이로써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삼국의 무덤 양식이 모두 돌방무덤 양식으로 통일된다.
신관리 석실고분의 널방은 여러 장의 큰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널길은 남벽 중앙에 붙어 있다. 천정은 역시 판석을 양쪽 벽에서 맞배식으로 올려놓아 전체적으로 널방의 단면이 5각형을 띠고 있다. 이것은 백제 돌방무덤 중에서도 특이한 천정구조이다. 널길과 남벽 사이에는 문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문틀의 외부에서 널방을 막는 문짝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에 위치한 1호분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나 2호분은 훼손이 심하고 매몰되어 있어 지표면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도굴된 상태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신관리 석실은 사비기 무덤이므로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기 어려움. -> 신관리 석실고분은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무덤이다.
- 석실분에 대한 설명에서 굳이 고구려, 신라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음. ->석실분은 돌방무덤으로 백제의 다양한 무덤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이다.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는 왕릉과 귀족의 무덤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사비로 천도한 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2기로 구성되어 있고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규모와 구조가 서로 거의 동일하다. -> 2기가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그 규모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 석실고분은 돌방무덤으로 불리며, 백제의 다양한 무덤 양식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으로 꼽힌다.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고구려와 신라도 처음에는 다른 무덤 양식을 사용하다가 6세기 중엽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수용하였다. 이로써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삼국의 무덤 양식이 모두 돌방무덤 양식으로 통일된다. -> 석실고분은 돌방무덤으로 불리며, 4세기 중후반 한성 지역에 도입된 양식을 계승하여 웅진기에도 사용하였고,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이러한 돌방무덤 양식이 중심 묘제로 정착되었다.
- 이것은 백제 돌방무덤 중에서도 특이한 천정구조이다. -> 삭제 요망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2기로 구성되어 있고~ => 2기가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그 규모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 확인되었고~ => 확인된 이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 석실고분은 돌방무덤으로 불리며, 백제의 다양한 무덤 양식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으로 꼽힌다. => 이 고분은 백제의 다양한 무덤 양식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으로 손꼽히는 돌방무덤(지하에 굴을 파고 돌을 이용해 방을 만든 형태)이다.
- 5세기 후반부터
는-> 불필요한 조사 삭제 요망 -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고구려와 신라도 처음에는 다른 무덤 양식을 사용하다가 6세기 중엽부터는 이 무덤 양식을 수용하였다. =>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 이 무덤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6세기 중엽부터는 고구려와 신라도 이 양식을 따르면서 돌방무덤은 삼국의 공통된 무덤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 석실고분 설명 부분은 자료를 그대로 옮겨적지 말고 눈으로 보는 듯 실감있게 글을 다듬어주세요.
2차 수정
신관리 석실고분은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무덤이다. 2기가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그 규모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1966년 공주대학교 신축부지공사 중에 백제 토기가 발견되면서 확인되었고, 이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석실분은 돌방무덤이라고도 불리며, 백제의 다양한 무덤 가운데 가장 발달한 양식이다.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후반부터는 왕릉과 귀족의 무덤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사비로 천도한 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신관리 석실고분의 널방은 여러 장의 큰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널길은 남벽 중앙에 붙어 있다. 천정은 역시 판석을 양쪽 벽에서 맞배식으로 올려놓아 전체적으로 널방의 단면이 5각형을 띠고 있다. 널길과 남벽 사이에는 문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문틀의 외부에서 널방을 막는 문짝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에 위치한 1호분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나 2호분은 훼손이 심하고 매몰되어 있어 지표면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도굴된 상태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