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스님(庚圓, 1960生, 비구니)
경원(庚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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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경원(庚圓) |
법호 | 선혜(善惠) |
속명 | 허선(許先) |
출생 | 1960,3,2 |
출가 | 1979년 |
입적 | |
사찰 | 극락사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4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경원(庚圓)스님은 명욱(明旭)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다양한 단체의 지도법사를 지내는 등 포교에 전념하고 대전 광제사를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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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경남 양산 출생 |
1979 | 명욱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79 | 설정(雪靖)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9 | 견성암 안거 이래 약수암, 대성암 등에서 10여 안거 성만 |
1983 | 동학사 강원 졸업 |
1984 |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7~1999 | 대전 광제사(구 중앙불교회관) 설립 및 종단 등록 초대 주지 |
1988~1991 | 대덕연구단지 성불회 창립 및 초대 지도법사 |
1988~1994 | 대전시 서부경찰서 경승 |
1989 |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전공 |
1989~1999 | 대전 운전기사 불자연합회 창립 및 초대 지도법사 |
1990 | 대한불교청년회 대전지부 설립, 중앙회 이사 및 초대 지도법사 |
1990~1999 | 대학생 불교연합회 대전지부 설립 및 초대 지도법사 |
1994~1999 | (사)생명나눔실천회 초대이사 |
1994~1999 | 한국 운전기사 불자연합회 창립 및 초대 지도법사 |
1994~1999 | 경비교도대 불자회 창립 및 초대 지도법사 |
1995 | 보은실천회 설립 |
1995~1999 | 정진선원에서 2년 안거 |
1999 | 대전보건대학, 우송정보대학 등 5개 대학에 불상 봉안 및 지도법사 |
1995~ | 현재 대전교도소 종교위원 |
1997~1999 | 충남도청 불자회 창립 및 초대 지도법사 |
1999~2002 | [ 광제사] 불교대학장 |
2004 | 극락사 주지 및 비구니선원(진공선원) 건립 |
기타사항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저서 및 작품 | 『우리말 법요집』(불광출판부), 『신행귀감』(샹카일꾸람)
『불복장의 비밀』, 민족사, 2018 |
생활신조 | 정성(精誠)을 다한다. |
상훈 | 동국대학교 표창(1989) 외 다수 |
수계제자 | 선경(先炅)·지응(知應)·성윤(成潤)·원정(圓禎)·동우(東宇) |
활동 및 공헌
출가
선혜(善惠) 경원(庚圓)스님은 1960년 3월 2일 경남 양산군 물금면 소토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허선이다. 어려서부터 불심이 돈독하여 조계사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스님은 1979년 명욱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덕사 견성암에서 설정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그 후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선 안거를 시작으로 약수암, 대성암, 불영사, 영각사 등 선원에서 8하안거를 비롯하여 모두 10여 안거를 성만하였다
수학과 불사
출가 후 스님은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지장암으로 돌아와 재무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라남도 장성 백양사 천진암에서 사찰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스님은 중국 유학과 천일지장기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의 많은 대중스님들이 발우를 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스님에게 누군가가 스님 자리라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법석을 여는 꿈을 꾸다니….’
스님은 꿈이 천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감하고 천진암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 천진암으로 내려가 불사에 혼신을 다하였다. 천진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당시에는 낡은 법당과 허물어져가는 요사채만으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천일지장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보수하고 부족한 생활용수를 보충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이용했던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었으며, 천진암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후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를 보수하여 천진암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호남에 비구니 선원이 거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워 파도처럼 밀려오던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10월 15일 삼천일 지장기도 불사 회향을 하면서 호남에 첫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 백암선원(白岩禪院)을 개원하고 그 해 첫 동안거를 열었다.
은사와 상좌의 입적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오대산 지장암 면모 일신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와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처가 다 배움터요, 행하는 모든 일이 공부 아님이 없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이에 스님은 지장암으로 돌아왔고 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화두와 직면하게 되었다.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화두, 곧 육신을 죽일 것인가, 설자리를 버릴 것인가, 마음을 죽일 것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공동체 삶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에피스드를 수행의 재료로 삼아 어려움을 통해 겸손을, 가난한 살림살이를 통해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또한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라는 명성에 조금이라도 부응할 수 있도록 지장암 내 기린선원을 정비하여 많은 대중이 살 수 있게끔 조건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사찰
- 극락사(☎ 041-751-2012):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459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59~463.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31.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
- 월정사 지장암 감원 정안스님 입적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475
- 佛心도 반해버린 산 병풍과 계곡 물소리, 백암산 천진암 [자비화 카페],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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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淨岸)스님 | 본항목 | 정안스님(淨岸, 1951~2014) | 淨岸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안스님(淨岸,_195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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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淨岸)스님 | 봉래(蓬萊)문중 | ~의 일원이다 |
정안(淨岸)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 |
정안(淨岸)스님 | 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정안(淨岸)스님 | 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
정안(淨岸)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