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완스님(仁完, 1930生, 비구니)
인완(仁完)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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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인완(仁完)<ref>'정환'이라는 기록도 있다.(출처: 아비라 카페 47년전 대구시 실달유치원 자료를 구합니다.) |
법호 | 무위(無爲) |
속명 | 오충자(吳忠子) |
출생 | 1930.09.21. |
출가 | 1935년 |
입적 | 2012년 |
사찰 | 대휴사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384 |
특이사항 |
정의
인완(仁完)스님은 혜옥스님의 상좌로서 스승 혜옥스님을 도와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스승을 도와 대구 실달사와 실달유치원에서 어린이와 여성 포교에 매진하고 실달사와 대휴사의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1930 | 일본 동경 출생 |
1935 | 청암사에서 혜옥(慧玉)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2 | 김천 증산면 심상소학교 졸업 |
1943~1945 | 청암사에서 행자 사미니과 수료 |
1946 | 청암사에서 구산(九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6~1947 | 청암사 수도암 안거 성만 |
1948 | 은사를 도와 대구 실달사 실달 유치원 개원 |
1949~1951 | 능인학원 수료 |
1955 |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6 | 대구 실달사 주지 취임 |
1958~1961 | 수도사, 부인사 등에서 기도정진 |
1962~1963 | 경산포교당에서 원주소임 |
1964 | 용화사 안거 성만 |
1968 | 김천 대휴사 원주소임 |
1983~2000 | 대휴사 주지소임 |
2012 | 입적 |
문중 | 계민(戒珉)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제철(齊哲)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봉전(奉典, 8)→경원(敬圓, 9)→문오(文悟, 10)→혜옥(慧玉, 11)→인완(仁完, 12)→제철(齊哲, 13) |
활동 및 공헌
출가
무위(無爲) 인완(仁完)스님은 1930년 9월 21일 경북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에서 아버지 오개수와 어머니 박경식의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이름은 오충자이다. 인완(仁完)스님은 6세 때인 1935년 10월 30일, 김천 청암사에 입산하여 혜옥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File:대휴사요사채.png|섬네일|[대휴사 요사채]
사진출처:대휴사 수정스님 제공]
교육
1942년 2월에는 김천시 증산면 심상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3년에는 청암사에서 행자 사미니과 교육을 3년간 받았다. 인완스님은 1946년 4월 15일 청암사에서 구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1949년 3월에 능인학원에 입학하여 1951년 10월에 수료하였고, 1955년 3월 8일 선학원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수행
1947년 1월 15일 청암사 수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48년에는 대구 실달사(유치원)에서 기도정진을 하였다. 1958년에 수도사에서 기도정진을 하였고, 1961년에는 부인사에서 수행했다.
소임
1956년 3월에는 실달사 주지로 취임하여 2년간 소임을 살았다. 이어 1962년 10월에는 경산포교당에서 2년간 원주소임을 맡았다. 1964년 용화사에서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68년 2월에는 대휴사에서 원주소임을 살았다. 1983년 10월 김천 대휴사에서 주지로 취임하여 2000년 1월 30일까지 소임을 다했으며, 그 후 한주(閑主, 한가한 주인)로 물러나 수행정진에 진력했다.
은사 혜옥스님과 대구 실달유치원 개원
은사스님인 혜옥스님은 1948년 대구부인연합회의 초청으로 실달사 주지로 부임하여 대구에 첫 불교계 유치원인 실달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실달'은 '싯다르타' 즉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은사 혜옥스님은 3회 유치원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51년부터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지장기도로 정진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법문을 하셨고 인완스님은 그런 은사스님을 도왔다. 그 당시 은사스님을 잘 따라주던 원생들이 아주 귀엽고 대견했었던 기억에 훗날에도 감회에 젖곤 하였다. 스님의 은사인 혜옥스님께서는 새싹불자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인완스님은 그러한 은사스님의 뜻에 부응하면서 7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원생기도와 유치원 보조협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실달사는 유치원뿐 아니라 일요일마다 아동법회를 열었으니 오늘날 어린이법회의 효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구 실달사에서 은사 혜옥스님이 법회 도중 방광하시다
실달유치원의 자모회와 실달사 부인연합회, 일반신도 등 불자 200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법좌에 모인 설자(說者)와 청자(聽者)는 일심동체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은사 혜옥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아유일권경 (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 (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 (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 (常放大光明)
혜옥스님께서 법문에 앞서 이 게송을 하시는 순간, 갑자기 세 차례나 방광을 하였다. 폭염의 더위마저 극락정토로 변하는 이적에 감읍하여 대중의 환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대중은 더욱 환희심을 내어 청문정진에 한사람도 빠짐없이 끝가지 회향을 잘하였다.
밀행제일 인완스님
손상좌 수정스님은 “요즘 세상에 인완 노스님 같은 스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 노스님이 수행하던 것을 떠올리면 과연 어디 또 그런 스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행하셨던 분이다.”라고 회상했다. 수정스님에 따르면 인완스님은 얼굴이 맑고 깨끗했으며, 걸음걸이, 언행,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단정했다고 한다. 외모에서부터 기품과 바름이 풍겨져 나왔다.
수정스님은 “인완 노스님은 혜옥 스님을 시봉하느라 대학도 가지 않았지만 실력이나 능력도 출중했다. 노스님은 오로지 기도, 간경, 강의, 공부하는 것 밖에 몰랐다. 목소리가 너무 좋아 염불을 하면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면서 무더웠던 한 여름에 지장기도를 하던 어느 날에는 무려 2시간씩 이어지는 기도에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였지만 노스님이 화엄경 강의를 하자 화엄신장 탱화에서 방광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날씨가 더운 데에도 신도들이 더욱 신심을 내어 용맹정진하여 하안거를 원만성취를 했다는 소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고 전했다. 글도 잘 쓰시고 붓글씨가 인쇄한 것처럼 쓰는 명필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그 인품을 쉬이 짐작해 볼 수 있다. 인완스님은 손주상좌 수정스님이 하시던 어린이법회를 10년간 후원하셨다. 수정스님은 "우리 노스님은 아이들에게 베푸는 자비가 흘러넘쳤다. 노스님은 아이들이 오면 계단에 올려놓고 옆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앨범을 만들어 주었다. 몇 년 몇 월에 누가 데리고 왔다는 것부터 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 노스님은 1년에 3~4번은 사진을 함께 찍었다. 또한 아이들은 좋은 데에서 경험을 해야 한다며 많은 곳에 데리고 가셨다. 나는 아직 에버랜드, 식물원 이런 곳도 가보지 못했는데 노스님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곳에 꼭 아이들을 데려가셨다”고 한다. 인완스님은 항상 "신구의 삼업에 주의하라."고 당부하셨으며, 매사에 하신 일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절집에서 하는 모든 일이 불사이고 수행이라며 매사에 정성을 다하셨다. 명실상부한 '밀행제일'의 삶을 사셨던 것이다.
인완스님의 기도와 가피
손상좌 수정스님에 따르면 대휴사는 또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인완노스님이 기도한 것 중에 이뤄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한다. 열반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은 것이 딱 2가지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돌아가신 이후에 다 성취되었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는 주지스님 막내 조카 부부에게 10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10년째 아이가 없던 그 가정에도 노스님이 돌아가신 이후 꿈을 꾸고 나서 귀중한 아이를 드디어 얻게 되었다고 한다. 또 대휴사 관음전 부지를 사려고 30년을 기도했는데 돌아가신 이후 매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완스님에 관한 추가자료
아래 내용은 인완스님의 손상좌 수정스님이 2023년 5월 9일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 제공한 인완스님에 대한 추가자료이다.
인완스님의 1차 발심
1933년경 경북 불영산 청암사 백련암에 짧은 치마를 입은 신여성이 4살 된 애기를 안고 찾아왔다. 주지 혜옥스님의 셋째 여동생이었다. 하얀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여 환자인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폐병을 앓고 있어서 밖에 나오지 않고 방에 누워있었는데 밖으로 기침소리가 나고 가끔 흰 천에 붉은 피가 묻은 빨래가 나왔다. 이 때 엄마 품에 안겨온 아기가 출가하여 인완스님이 되셨다.
인완스님이 5살 되던 해 초여름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청암사 화장막에서 화장을 했다. 장례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백련암은 다시 고요해졌다. 한여름 어느 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고 어두컴컴해지더니 억수같이 소나기가 내렸다. 어린 인완스님은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기억을 더듬다가 화장막으로 달려갔다. 숨가쁘게 도착하여 보니 화장한 날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이 고운 흙과 재조차 다 떠내려가고 모래와 자갈들만 남아 있었다. 허망했다. 무엇이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 “아무것도 없네! … ” 스님은 장대비를 맞으며 화장막 앞에 우두커니 서서 삶의 무상함을 뼛속 깊이 느꼈다고 한다. “사람이 살다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절에 돌아오니 스님들이 모두 걱정하며 어린 인완스님을 찾고 있었다. 스님은 어른들의 걱정을 듣고 나서 다시는 화장막에 가지 않았다. 1935년 6살에 머리를 깎고 혜옥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셨다. 9살 되던 해부터 공양주 채공을 살면서 평생 은사스님의 그림자처럼 시봉이 시작되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와 2차 발심
인완스님은 김천 대휴사에 머물기 시작하던 30대 초반에 어릴 때부터 가끔 앓았던 중이염이 심해서 귀수술을 받게 되었다. 대구 종로이비인후과 원장 백 박사는 교회 장로였다. 백 원장님은 스님의 중이염을 쉽게 생각하고 1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록 수술부위가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부어올랐다. 또한 빈속에 항생제를 장복하니 위장이 아파서 스님은 이제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덧 음력 12월 29일이 되었다. 스님은 새해 명절 준비가 걱정이 되어 퇴원하여 김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원장님은 더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 안 된다고 했다. 죽어도 절에 가서 죽어야 하지 않겠냐고 사정하고 우겨서 겨우 1일간의 약 처방을 받고 1박2일 외출을 나왔다.
스님이 대휴사에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대구 신도 중 어떤 사람이 참기름 2병을 주면서 자신을 대신해 기도를 해 달라고 했다. 스님은 신도가 준 참기름 두 병을 받아들고 명절이라 힘들게 기차표를 구해서 절에 돌아오니 사중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방에는 불기운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스님은 좌복을 깔고 담요를 덮어쓰고 쪼그리고 앉았다. 스님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부처님 전 인등에 기름불을 켜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매일 마다 붕대를 풀어서 귀 상태를 확인했고, 그럴 때마다 스님의 귀는 벌겋게 부어 있었고 며칠이 지나니 이제는 아예 귓구멍조차 다 막혀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일주일째 되는 날 그날도 평소와 같이 아침 예불을 마치고 관음정근을 하고 방으로 내려왔다. 상좌 제철스님이 약을 바르려고 스님의 귀에 감아 둔 붕대를 풀었더니 부엇던 귀가 어느새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귓구멍까지 분명하게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환희심에 정월 15일 회향하는 날까지 계속 가행정진 하였다. 스님은 이때 확고해진 신심이 평생을 일여하게 정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보름회향 후에 제철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대구 종로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이비운후과 원장 백 박사는 처음에 환자를 보더니 너무 늦게 왔다고 어두운 얼굴로 걱정을 했다. 하지만 붕대를 풀고 귀를 확인하더니 환자의 등을 탁 치며 얼굴을 들여다보고 “하느님만 신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부처님 영험도 대단합니다.”하면서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스님은 1주일치 약을 처방 받고 돌아와 완쾌되었다.
인완스님의 발원문
아침 저녁으로 향과 등불과 촛불을 부처님 전에 올리고
삼보에 귀의하고 금선(부처님)께 예를 올리옵니다.
남북이 통일되고 무기와 전쟁이 없어지고
천하가 태평하여 법륜이 굴러가기를.
법륜이 끝없는 곳 까지 항상 굴러가서
만세에 항상 평안하여지이다.
원하옵건대 세세생생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반야에서 물러나지 아니하여
본사 석가모니의 용맹한 지혜와 같고
노사나 부처님의 큰 깨달음과 같으며
문수보살의 큰 지혜와 같고
보현보살의 광대한 행원과 같으며
지장보살의 가없는 몸과 같고
관세음보살의 32응신과 같아서
시방세계에 두루 나타나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무위에 들게 하여지이다.
내 이름을 듣는 자는 삼악도의 괴로움을 면하고
내 모양을 보는 자는 해탈을 얻게 하여 지이다.
이와 같이 항사겁이 지나도록 교화하여
필경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어지이다.
인등 향 촉 시주자는 광명을 얻고
창호와 도배를 시주한 자는 팔난을 면하고
유기그릇과 쇠그릇을 시주한자는 몸이 견고하고
사사 시주자들은 복과 수명이 날로 늘어나지이다.
선망부모는 극락에 왕생하고
현존하는 스승과 친한 이의 수명은 바다와 같고
일회대중은 혜안이 밝아지고
법계의 함령들은 보리심을 발하고
산문은 고요하고 슬픔과 근심이 끊어지고
도량 내에 재액은 영원히 소멸하고
팔부성신은 도량을 수호하여지이다.
세상마다 항상 보살도를 행하여
구경에 살바야와 큰 반야바라밀을 원만 성취하여지이다.
(1973년 11월 7일 복축)
인완스님은 흔히 절에서 아침저녁 축원하는 행선축원인 이글을 한문으로 쓰고 읽으시면서 이 발원이 원만히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옆에서 모시던 보살들에 의하면 스님은『법화경』 사경을 하셨는데 책도 매우 잘 매고 글씨도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전해진 것은 없다.
수행정진
1960년 스님 나이 27세였다. 백운학 작명가가 법명 정환(正煥)은 몸이 아프고 고단하다며 인완(仁完)으로 새 법명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으로 부르면 앞으로 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비로소 ‘인완’이라는 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옛 어르신들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정환’스님으로 기억하는 분이 많다. 1964년 전남 순천 송광사 구산 큰스님으로부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받았고 호를 무위당(無爲當)이라고 내리셨다. 스님은 이때부터 비로소 화두참구를 시작했다. 화두와 함께 묵언을 병행하셨는데 평생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오로지 독송과 화두에 일념이셨으며 80이 넘으시도록 부처님 시봉으로 대웅전을 쓸고 닦고 공양올리고 예경하셨다. 묵언을 하셨으므로 소임을 살 때 주변사람들에게 무시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인완스님은 매일 예불정근 후에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과 『금강경』을 독송하셨으며 결재동안은 송광사 구산스님께 받은 ‘구자무불성’ 화두를 들고 참구하셨다.
손주 수정스님이 1989년 11월(29세) 「보현행원품」을 써서 28폭 병풍으로 만들어 드렸더니 인완 노스님은 대웅전 문 앞에 바람막이로 그 병풍을 치고 둘러보시며 무척 좋아하셨다.“보현십원을 꼭 실천하며 보현행자의 길을 가다보면 어느 날 지혜가 열릴 거다. 애썼다. 보현십원을 수행하려면 인내하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한다. 수행은 끝없이 자비로워야 한다. 자비로워지면 저절로 참아지고, 찬탄하게 되고, 어른을 공경하고, 중생들의 뜻에 거슬림이 없게 된다.”하시고 그 자리에 서서 병풍을 보시면서 끝까지 독송하셨다. 그 후에도 예불 후에는 병풍을 보고 독송하곤 하셨다.
인완스님은 사찰요리도 매우 잘 하셨으며 어식에도 밝아 막히는 데가 없으셨고, 소임 (서기, 회계, 글씨, 재단 재봉 등)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맡으면 조용히 완벽하게 처리하셨다.어른스님이나 대중스님의 옷을 재단해서 직접 만들어 입혔고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었다. 정월 해제를 하고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등을 직접 만들었다. 종이를 구하여 습도조절을 위해 녹이고, 재단하고, 병에다 감고, 투명한 실로 감아서 방바닥에 그것을 말렸다. 다 마르면 감았던 실을 풀고 종이를 불어서 한 장씩 떼어서 풀을 발라 비벼 정리해 두었다. 철사로 등의 틀을 만들고 속지를 붙이고, 마르면 연잎을 한 장씩 붙였다. 이렇게 만든 연등은 밤새 이슬을 맞아도 색이 날리거나 쳐지지 않았고, 바닥에 굴러도 연꽃잎이 그대로 있었다.
이처럼 스님은 능력이 다재다능했지만 묵언수행으로 일관하시며 남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바보’, ‘멍충이’, ‘등신’ 소리를 들어도 마음에 흔들림 없이 일상을 규칙적으로 정진하였다. 당시 어른 스님들이 스님을 명사로 추천하고자 했으나 극구 사양했다. 후학들은 스님의 인품을 존경했지만 이렇게까지 사양하시니 때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손상좌 수정스님은 ‘세월이 흘러 공부가 익어가는 것인지 어느 날 문득 스님의 밀행과 무주상보시가 이해되었다.’고 하신다. 수정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다운 분이 있다면 바로 인완스님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스님은 평생을 힘들어도 힘들다 불평하지 않으시고 은사스님 시봉에 지극정성이셨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셨다. 문하에 학사2명(도이 보성 보경) 석사3명(수경 불성 주호) 박사2명(수정 도은) 기타 수좌4명(성우 성윤 성일 법진 마승) 배출하셨다. 그 외 여러 유아들을 키우셔서 학교를 시켜서 제각기 유치원교사도 하고 결혼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다. 85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어린이법회를 운영했는데 꼭 참석하셔서 살피셨다. 이때 매주 토요일 120여명의 어린이가 법회에 참석하였고 방학 때는 250여명의 어린이가 하계 동계 수련회에 참여했다. 2000년 전후로 어린이가 감소되면서 초등학교들이 폐쇄되고 법회가 중단되었다.
인완스님은 지장재일이면 손자 수정스님의 독불공 기도를 35여년을 하셨다. 어릴 때 바로 위의 언니가 죽었는데 그로 인한 충격이 매우 컸다.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지 못해서 신심이 많이 힘들었다. 출가하여 인완스님의 지극정성 기도덕분에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점차 몸이 좋아졌고 다시 공부도 하게 되었다.
다음은 가까이에서 스님을 모시던 보살들이 스님께 직접 들었다는 일화이다. 인완스님이 5세 되던 해 초가을 무렵, 어머니를 잃은 어린 인완스님을 보기가 딱해서 어느 보살이 마른 오징어 다리를 하나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입에 넣어 주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혜옥스님이 나타나서 ‘어디 절에서 비린 생선을 먹느냐’고 불호령이 떨어져서 도망을 가는데 혜옥스님이 자꾸 쫓아오시니 어린 인완스님은 그만 물로 뛰어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혜옥스님은 뒤돌아 가셨다고 한다. 그 후 인완스님은 계율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잘 수지하면서 평생 오신채를 입에 대지 않았다. 오신채를 먹고 육식을 하면 아귀가 그 입술을 햝아서 수행에 장애가 생긴다고 했다.
1990년대 초에 송광사 보성스님이 청암사에 일이 있어 다녀오시다가 김천 대휴사에 들리셨다. 상좌 제철스님과 손주 상좌들이 보성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보성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거기 앉아봐라. 너희 인완 노스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서로 자주 봐서 잘 아는 사이니, 우리 두 사람은 사미계 도반이었다. 너희 노스님은 신심이 모두 청정한 보배스님이니 잘 모시거래이….부처님 시봉 잘하고, 어른스님 잘 모시고, 가람수호 잘 하고 후학들 잘 지도하니,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화두 들고 염불하니 최고의 수행 아니겠나?”하시면서 지난날에 수행할 때의 얘기와 짧은 법문을 해주셨다.
불사
- 1983년 7월 주지 취임 후 9월에 384번지 349평을 매입하여 옛 토지와 합하여 밭을 대지로 지목변경하고 12월에 선학원 재단에 등록을 마쳤다. 보광전의 규모가 협소하고 비가 새어 중창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3천일기도를 시작하였다.
- 1990년에 30평 목조 토기와 대웅전을 신축하고 석가모니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하여 모셨다.
- 1992년에 절 입구 도로공사와 주차장 및 해우소를 신축하였다.
- 1993년 384번지에 170평 지하 1층 지상3층 요사채를 신축하여 7월에 준공하고 지하수 개발과 도량정비 공사를 하였다.
- 1994년 9월 황의민 거사님이 규석공장 입구부터 367번지 519평을 대휴사에 헌납하도록 했다.
- 1999년 3월 15평 비로전을 신축하고 인완스님이 대구 실달사에서 부터 모시던 불사 비로자나불을 봉안하였다. 두 번에 걸친 3천일기도를 회향하였고 2001년 중반 20여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완성하였다.
- 2005년 대휴사 사적비의 연기문을 써서 남양주 봉선사에 역경원장이셨던 월운스님을 찾아가서 보였다. 스님은 ‘이런 비구니가 시골 김천에 있었어? 비구니가 비문을 쓰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고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하시면서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다. 이어서 혜옥선사공덕비명병서 덕순스님공덕비 불사동참공덕비문을 직접 쓰고 비를 세워 제막식을 봉행하였다.
- 2013년 음력 1월 12일 오후 5시 45분 사바의 인연을 마치고 고요히 열반에 드셨다. 화장하여 그대로 보내기 아쉬워 영옥을 만드니 연두빛 맑은 색깔이 매우 아름다웠다. 본향 배재열 사장님이 “매우 큰 스님이신가봐요 이렇게 일률적으로 이런 색이 나오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수정스님은 노스님 거처하시던 방에 모시고 49재 동안 문안드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49재를 모시고 오후에 부도탑에 모셨다.
大休寺創建緣起文
慶尙北道 金泉市 知禮面 上部里 三八四番地 文義山 西北麓에 西向하여 位置한 大韓佛敎曹溪宗大休寺는 新羅 憲康王 때 生存하셨던 道詵國師가 創建하시어 隱跡庵 또는 隱祖庵이라 하였고 大德面 所在 鳳谷寺의 屬寺였다는 事實이 鳳谷寺의 400年前 文獻에 傳할 뿐 中間의 仔細한 過程은 傳하지 않는다 이 隱跡庵은 元來 上部里 山28番地에 있었다 日帝强占期 때 그 一帶의 硅石鑛山을 開發하는 狀況에서 住持 奉讚스님이 住持職을 辭任하고 그 뒤에 奉進스님이 就任하였으나 잦은 發破로 寺宇가 振動하고 佛像이 顚覆되는 등 더 以上 견디기 어려워 西紀1920年에 上部里 山383番地로 法堂 8坪과 草家요사채 三間을 지어 移轉하고 1944年까지 住錫하였다. 이듬해 相鳳스님이 赴任하여 寺名을 大休寺라고 고치고 住錫하시는데 水害를 만나 요사만 남고 모두 消失되었으나 復舊하지 못한 채 1957年 入寂하였다(규석광산으로 인해 白雲寺 또는 國雲寺라고 잠깐 씩 부르기도 했다) 그 後 知禮面에 살던 兪大覺華佛子의 주선으로 靑巖寺 極樂殿에 계시던 德順스님을 모셔오니 3間요사를 法堂삼아 精進을 始作하였다 1963年에는 申重達居士의 設辦으로 시멘트 기와 法堂 8坪을 짓고 文德淵處士가 383番地의 田363坪을 施主하였고 1968年 仁完(正煥) 齊哲 두 비구니스님을 비롯하여 차츰 大衆이 모여 오늘의 會上을 이루었다 1983年 7月 15日 德順스님이 住持職을 辭任하고 仁完스님이 就任하였다 1983年 9月 上部里 384番地 田359坪을 買入하여 垈地로 地目을 變更하고 같은 해 12月 13日 大韓佛敎曹溪宗 禪學院에 登錄을 마치니 垈地는 上部里 384番地 359坪 외 두 필지 合 420餘坪이요 建物은 普光殿 9坪 요사 4동 延建坪 72坪이였다 그리고 傳來하는 聖寶로서 木造 觀音菩薩座像(坐高82cm) 1座가 계신다
大衆은 다시 重唱을 發願하고 3天日祈禱를 始作하여 1990年 3月에는 木造 漢瓦 柱三包로 現 大雄殿 30坪을 짓고 法堂의 本尊佛로서 木彫釋迦坐像(85cm)과 左右에 觀音 地藏坐像을 挾侍佛로 모셨다 1992年에는 進入路 擴張 및 포장공사와 駐車場 新設 解憂所 新築 等 住居環境佛事를 했고 1993年에는 現요사3층 220坪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짓고 地下水를 開發하여 用水問題를 解決했고 1994年에는 黃義玟居士가 上部里 林野 367番地의 519坪을 喜捨해 道場擴張에 썼고 1999年에는 毘盧殿을 新築하고 傳來하는 毗盧遮那佛을 奉安하였고 다음해 4月에 德順스님이 入寂하였고 2001年에는 毘盧殿丹靑佛事를 마쳤고 2004年에는 大雄殿中鐘50관을 鑄造하여 打鐘하니 스님들의 긴 歲月을 통한 至重한 願力이 허허벌판에다 훌륭한 修道道場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 얼마나 장한일인가 이 道場에 살거나 잠깐 들리는 이는 단 한 생각이라도 그간 이 佛事에 애쓰신 여러분들의 勞苦를 한번쯤 생각한다면 그 분들의 至重한 恩惠에 報答하는 길이 될 것이며 佛法이 永遠히 이어져 萬代의 福田으로 빛날 것이니 이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隨喜同參하는 뜻에서 한마디 기록한다
佛紀 2549年 乙酉年 盂蘭盆齋日
東國大學校 譯經院長 月雲沙門 證明
大休寺會主 無爲堂仁完 謹識
大衆帙
會主仁完 住持齊哲 監院省佑 總務秀靜 盧殿度垠 書記陶邇 持殿陶弦 淨人 趙孝純 供司 李明淑
信徒帙
金淸明華 張普德華 兪大覺華 黃義玟 尹琦秀 催喜旭 羅貞玉 申東昊 朴聖洙 李應孝 張正得 羅銀柱 文英姬
催大慈行 申東樂 姜在錫 韓光洙 文喜淵 鄭石岩 白榮優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 354~35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 356.
- NDNnews(엔디엔 뉴스) ‘노스님의 청빈함. 인품.수행 정진을 이어가는 문의산 대휴사.’http://www.nd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592
- 아비라 카페, 47년전 대구시 실달유치원 자료를 구합니다. https://cafe.daum.net/abira/1YyP/436
- 2023년 5월 9일 손상좌 수정스님이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 제공한 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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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완(仁完)스님 | 본항목 | 인완스님(仁完, 1930~2012) | 仁完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완스님(仁完,_1930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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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완스님(仁完)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인완스님(仁完) | 혜옥스님(慧玉) | ~의 수계제자이다 | |
인완스님(仁完) | 김천 청암사 | ~에서 출가하다 | |
인완스님(仁完) | 구산스님(九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인완스님(仁完)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인완스님(仁完) | 대구 실달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인완스님(仁完) | 김천 대휴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인완스님(仁完)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김천 청암사 수도암, 인천 용화사(주안동) |
지도
- 대휴사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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