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혜스님(妙慧, 1943生, 비구니)
묘혜(妙慧)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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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묘혜(妙慧) |
법호 | |
속명 | 정수복(鄭秀福)[1] |
출생 | 1943. 1. 21. |
출가 | |
입적 | |
사찰 | 향림사 경북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85 |
특이사항 |
목차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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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 경북 영일 출생 |
대원사에서 행원(行願)스님을 은사로 출가 | |
1955 | 계룡산 갑사에서 대희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8 | 범어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4 | 향림사 창건 및 주지 취임 |
1987 | 대웅전 31평 완공, 5층 석탑 건립(1987~1988) |
1988 | 약사여래조성, 산신각 불사 완공 |
1999 | 3층 석탑 조성 건립 |
2001 | 요사채 1층 95평, 2층 45평 완공 |
2004 | 현재 향림사 주지 |
문중 | 계민문중(戒珉) |
생활신조 | 필경에 견성 성불하기 위해 계율을 생명처럼 지키자.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지만·지효·원지·지명·지경·지산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주화(周和, 12)→문성(文成, 13)→법일(法一, 14)→행원(行願, 15)→묘혜(妙慧, 16)→지만(智滿, 17), 지효(智曉, 17), 원지(原志, 17), 지명(智明, 17) |
활동과 공헌
독립운동가 정구용의 손녀
묘혜스님은 독립운동가 정구용의 손녀이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거사가 진행됐다. 10월 5일과 6일은 법정사 의거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구용의 손녀이다. 제주도 서귀포의 법정사는 비구니 봉려관스님(蓬廬觀)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1918년 무오년 10월7일 정구용 선생과 김연일(법정사 주지), 방동화, 강민수, 김인수, 김용충, 장림호, 김상언, 최태유 스님과 행자 김윤옥 등 승려 13인을 비롯한 거사의 주역 33인과 주민 700여명은 ‘왜인들을 몰아내어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격문을 발표한 뒤, 서귀포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인들을 몰아내며 민족의 독립을 주장한 무장봉기운동을 벌였다.
어린 시절
묘혜스님은 일곱 살 어린 나이로 묘관음사에 와서 열네 살까지 향곡 큰스님 회상에서 자랐다. 그런 인연으로 큰스님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들보다 많은 스님이다. 전생부터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성철 큰스님, 자운 큰스님, 우화 큰스님 석암 큰스님 등 당대 큰스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여러 큰스님들과 인연을 맺었으니 정말로 복이 많은 스님이다.
특히 성철 큰스님은 아이들을 좋아해 어린 묘혜에게 줄 사탕을 항상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줄 때는 그냥 주는 법이 없이 ‘줄까 말까’ 하시며 애를 한참 달군 뒤, 울리고 나서야 꼭 주셨다. 성철 큰스님은 바닷가로 산책 가실 때 ‘묘혜야, 내 따라가자’하며 손잡고 가신 적이 많았다. 그 때마다 장삼소매 속에 사탕을 숨기고 가서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사탕을 나눠주곤 하셨다. 그 때도 그냥 주는 법이 없고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이라고 부처님 명호를 불러야만 주셨다. 그 당시 성철 큰스님께 사탕을 얻어먹었던 아이들은 이젠 중년이 되어 나에게 ‘사탕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땐 그리 큰스님인줄 몰랐심더. 사탕 얻어먹을라꼬 시키는 대로 큰소리로 염불했다 아입니까. 인자 해인사에서 종정이 되싰다 카데요.” 어릴 때부터 묘혜스님은 스님들만 보면 좋아했다. 절에 가면 스님들이 많다고 하니 따라 가겠다고 졸랐다. 신도 한분이 묘관음사에 오면서 한 번 데리고 왔다. 그랬더니 나이도 어린 것이 다음날 묘관음사로 찾아왔다. 혼자서 몰래 십리 길을 걸어온 것이다. 집에서 찾으러와 아무리 가자고 해도 고개를 흔들며 안 간다고 막무가내였다. 딸아이였지만 하는 수 없이 큰스님회상에서 키우기로 정했다. 전생부터의 인연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아직 어린애라 큰스님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자랑스럽게 “향곡 큰스님”이라고 답해 어른스님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느 날 석남사 주지이신 인홍스님이 와서 물으니, 여느 때와 똑 같이 “향곡 큰스님”이라고 말했다가 혼이 많이 났다. 그 뒤로는 그런 대답을 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누가 물으면 입을 다물었다.
어린 묘혜는 천성이 바지런해 뭐든 혼자 척척 해냈다. 어느 날 대중스님들이 감자 캐는 운력을 하러 가서 저녁에 돌아왔다. 아홉 살 난 꼬마가 스님들이 늦게 돌아오면 배고플 거라고 미리 밥을 지어놓아 깜짝 놀라 혀를 내둘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할 정도로 영특했던 모양이었다. 눈치도 빨라 큰스님 회상에서 누구 하나 성가시게 하는 법도 없고 어린데도 뭐든 똑 부러지게 잘 해서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우리 은사스님이 말했다. 큰스님도 그런 묘혜가 기특해 보기만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큰스님 회상에는 사부대중이 살아 비구니스님들도 더러 와서 살았다. 묘혜스님은 계집아이라고 여자 옷을 입혀 키웠다. 그 중에서 일타큰스님의 누님인 응민스님은 묘혜를 각별히 귀여워해 설이나 추석에는 직접 천을 구해 와서 만들어 입혔다 그뿐만 아니라 천 쪼가리만 있으면 모아두었다가 시간만 나면 재봉틀을 돌려 이것저것 만들어 주었다. 다른 스님들이 시샘을 할 정도였다니 어지간히 예뻐한 듯하다.
묘혜스님의 기억 속에 큰스님은 자비로움 그대로였다. “어린애지만, 한 번도 나에게 나쁜 말을 하시는 것을 못 들어 보았다. 원래 점잖으셔서 ‘가시나’ 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신 적도 없었고 장난으로라도 때려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4살이 되던 해, 큰스님은 ‘여자아이라 더 이상 월내에 두면 안 되겠다’고 묘혜스님을 진주 대원사로 보냈다. 행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큰스님의 뜻에 따라 제방의 선원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였다.
지금도 향림선원에서는 운봉 큰스님과 향곡 큰스님의 영정을 나란히 모셔놓고 조석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월내 묘관음사에서 지내는 큰스님 기일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스님께 올릴 공양물을 손으로 정성스레 만들어 와서 해마다 올린다. 스님의 정성에 탄복할 따름이다.
향림선원의 유래
현재는 하양의 향림선원(香林禪院)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중과 함께 정진하며 외호에 힘쓰고 있다. 선원의 이름은 향곡 큰스님이 지어주셨다. 큰스님의 법호인 향곡혜림(香谷蕙林)에서 향림(香林)이라는 두 글자를 떼어 주실 정도로 묘혜스님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5.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49, 351.
- 불교신문, “사탕 얻어먹을라꼬 염불했심더”(향곡 큰스님의 일화),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04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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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혜스님(妙慧) | 본항목 | 묘혜스님(妙慧, 1943~ ) | 妙慧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혜스님(妙慧,_194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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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혜스님(妙慧)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묘혜스님(妙慧) | 행원스님(行願) | ~의 수계제자이다 | |
묘혜스님(妙慧) | 산청(진주) 대원사 | ~에서 출가하다 | |
묘혜스님(妙慧) | 대희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묘혜스님(妙慧)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묘혜스님(妙慧) | 대구 향림사 | ~을(를) 창건하다 | |
묘혜스님(妙慧) | 대구 향림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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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경산 향림사(향림선원) : 경북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85
주석
다른 비구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