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7일 (화) 17:17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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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5 경남 합천 출생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1]을 은사로 출가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
문중 청해(靑海)문중
수행지침 부처님 법을 따르자
상훈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회진(會眞, 4)→정은(正恩, 5)→재희(在喜, 6)→창호(彰浩, 7)상덕(尙德, 8)[2]→해성(海星, 9), 해관(海觀, 9), 도경(滔鏡, 9), 준용(準用, 9), 동우(東佑, 9)

활동 및 공헌

출생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상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

염불의 달인

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불교정화 운동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

근검절약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

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해인사 홈페이지 http://www.haeinsa.or.kr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31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2.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33, 33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상덕(尙悳)스님 본항목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_192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상덕스님(尙悳)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상덕스님(尙悳) 재희스님(在喜) ~의 수계제자이다
상덕스님(尙悳) 해인사 약수암 ~에서 출가하다
상덕스님(尙悳) 보해스님(寶海)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상덕스님(尙悳)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상덕스님(尙悳) 대구 부인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상덕스님(尙悳) 양산 내원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상덕스님(尙悳) 해인사 연화대 ~을(를) 건립하다
상덕스님(尙悳) 해인사 연화대 ~을(를) 건립하다
상덕스님(尙悳) 안거 ~을(를) 성만하다 산청 대원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양산 내원사 등

지도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한국비구니명감』과 『한국비구니수행담록』에는 상덕(尙德)스님이 재희(在喜)스님의 제자로 되어 있고, 보명(普明)스님이 창호(彰浩)스님의 제자로 되어 있는데, 『한국의 비구니명감』은 상덕(尙德)스님이 창호(彰浩)스님의 제자로 되어 있고, 보명(普明)스님이 재희(在喜)스님의 제자로 되어 있어 서로 상반된다.(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p. 232. 493.,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318.,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23, 334.)
  2. 『한국비구니수행담록』과 『한국비구니명감』은 재희스님(在喜)의 제자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