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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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 = 태경스님(泰鏡,1930生, 비구니) |사진 = 503 태경(泰鏡).jpg |법명 = 태경(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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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20px" | 문중|| 봉래(蓬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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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20px" | 문중|| 계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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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탐(貪)·진(眞)·치(癡) 벗겨내니 원래 완벽하게 갖추어진 자성광명(自性光明) 절로 드러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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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신조||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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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신조||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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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도제교육 공로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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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전남 장성경찰서 감사장 수상(1989)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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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정효·정선·정법·정탁·정봉·정오·정석·정명·정준·정국·정진·정욱·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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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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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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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지훈(地熏)·지용(地湧)·지륜(地輪)·지광(地光)·지현(地賢)·해만(海曼)·지욱(地煜)·지우(地雨)·지중(地中)·지도(地導)·지경(地經)·지범(地凡)·지성(地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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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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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및 수학===
은공(恩空) 정안(淨岸)스님은 1951년 강릉 연곡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진경희이다.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던 1970년, 스님도 콜레라에 걸려 심하게 앓던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내 갈 길이 따로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트여 이듬해인 1971년 2월 1일 오대산 지장암(강원 평창)에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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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및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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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印哲) 태경(泰鏡)스님은 1930년 5월 13일에 경북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 817번지에서 아버지 정유문과 어머니 김두리 사이의 7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낙안이며, 이름은 정상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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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가족은 모두 불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동생 2명과 함께 가족 5명이 승려가 되었다. 스님의 언니는 여섯 살에 출가하였고, 스님은 방학 때 고모가 계신 절에 다니다가 고모스님의 권유로 1945년 3월에 해인사 삼선암에서 성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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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해인사에서 경하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해인사 강원의 사집과를 수료하였으며, 1951년 동화사 강원의 사교과를 수료했다. 1956년 순천 선암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였고, 1957년 스님의 나이 28세에 청도 운문사에서 정만우 강백으로부터 전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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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431-01.jpg|섬네일]]
 
[[파일:431-01.jpg|섬네일]]
  
===수학과 불사===
 
출가 후 스님은 [http://www.unmunsa.or.kr/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http://xn--q20bm8bgy1a0fc8wd.kr/ 오대산 지장암]으로 돌아와 재무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라남도 장성 [http://www.baekyangsa.com/ 백양사]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천진암]에서 사찰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스님은 중국 유학과 천일지장기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의 많은 대중스님들이 발우를 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스님에게 누군가가 스님 자리라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법석을 여는 꿈을 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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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재소자 포교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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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경스님이 서울 승가사에서 강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한전에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난 뒤, 젊은 남자가 탁자 위의 돈을 달라고 하면서 총을 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스님은 꿈이 천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감하고 천진암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 천진암으로 내려가 불사에 혼신을 다하였다. 천진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당시에는 낡은 법당과 허물어져가는 요사채만으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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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을 맨 처음 목격한 한 스님은 충격으로 3개월 만에 입적했고, 두 번째로 본 스님도 일 년 만에 입적했다. 태경스님은 세 번째의 목격자였는데 너무나 놀란 나머지 병을 얻어 더 이상 승가사에 머물지 못하고 대구의 고모스님 절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스님은 천일지장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보수하고 부족한 생활용수를 보충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이용했던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었으며, 천진암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후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를 보수하여 천진암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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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60년 대구교도소에서 하루는 70세의 고모스님과 함께 교도소 법회에 참관하게 되었는데, 당일 법문을 담당한 법사스님이 나오지 않았다. 스님은 갑작스럽게 법문을 부탁받았는데, 승가사 사건으로 심장이 놀란 스님은 뜻밖의 상황에 너무 떨려서 눈앞이 캄캄했다.
  
또한 호남에 비구니 선원이 거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워 파도처럼 밀려오던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10월 15일 삼천일 지장기도 불사 회향을 하면서 호남에 첫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 백암선원(白岩禪院)을 개원하고 그 해 첫 동안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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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겨우 단상에 올랐다. 낯선 젊은 스님의 등장에 대중(수감자)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스님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정 시간 3분가량 ‘부처님 위신력이 있다면 지금 저에게 가피를 주십시오.' 하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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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의 입정이었지만 차분해지고 정신이 또렷해져서 자신감이 생겼다. 스님은 한 시간의 법문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자신 있고 당당하게 법문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날 이후 스님은 대구교도소에서 4년 동안 법사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은사와 상좌의 입적===
 
===은사와 상좌의 입적===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오대산 지장암 면모 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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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의 수행자===
[[파일:431-03.jpg|섬네일|지장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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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03-01.jpg|섬네일|]]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와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처가 다 배움터요, 행하는 모든 일이 공부 아님이 없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이에 스님은 지장암으로 돌아왔고 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화두와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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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교도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타종교의 성직자들은 행사 날이 아닌 평일에도 교도소에 언제라도 드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 있는데, 스님만 없었다. 스님이 교도소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스님은 최종학력이 국민학교 졸업이라 교양 부족으로 수감자들에게 말실수를 할까 염려되여 출입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스님은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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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1961년 나이 32세에 도반스님 9명과 같이 원화여중에 입학을 했으나 만학의 스님 신분이므로 교복착용과 머리를 기르겠다는 약속으로 입학을 허락했다. 그러나 재학 도중에 계속 삭발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고 몇몇 스님들은 중간에 포기해서 4명만이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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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 후 조선대학교 부속학교인 남자고등학교에 비구니스님 3명이 입학을 했다. 남학생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중 두 스님마저 자퇴해서 스님만 혼자 남아 1965년 1월 26일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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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즈음에는 36세의 나이로 만학의 꿈을 이룬 스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크게 실릴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님은 동국대학교에 종비생 제도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2기 종비생으로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1969년 2월 28일에 졸업을 했다. 다시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종단의 발령을 받아 4년 동안 동학사 강사로서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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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싶었으나 건강도 좋지 않아서 결국 12년간의 학생 시절을 마쳤다. 동학사 강사 소임은 건강이 악화되어 1977년 3월 31일에 그만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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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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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는 조계종 제4, 5, 10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며 부지런히 활동을 하였으며, 1985년에는 비구니계단의 증사를, 1985년부터 1995년까지는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비구니 강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서 1999년까지는 갈마위원으로 수계 산림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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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와병 중에도 전계대화상으로서 잠시도 몸을 쉬지 않고 정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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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학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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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교육원에 있을 때 스님은 ‘파거불행 노인불수(破車不行 老人不修)’라는 법담을 꼭 해주었다. 스님은 젊은 시절에 놀란 심장과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마음만큼 거동이 여의치는 못하지만 지금도 쉼 없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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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았던 스님은 건강 악화로 학업을 다시 시작하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겼다. 그래서 평생 자신의 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언제나 탁마해온 스님은 후학들이 꾸준히 정진해주기를 간절히 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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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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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당 태경스님은 2006년3월18일 오후7시 서울 법성사에서 법납 61세 세납 77세로 원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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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국 비구니회장 명성 스님은 영결사를 통해, “여기 모인 사부대중은 평소 태경 스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며 후학을 양성하시고 정법계율을 강의하시던 그 형상을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해 슬픔에 잠겨 있다”며 “다시 사바세계에 나투시어 스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널리 펼치시길 바란다”고 슬퍼했다.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화두, 곧 육신을 죽일 것인가, 설자리를 버릴 것인가, 마음을 죽일 것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공동체 삶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에피스드를 수행의 재료로 삼아 어려움을 통해 겸손을, 가난한 살림살이를 통해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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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재경대구사범대구교육대학교동창회 다음카페(https://cafe.daum.net/tkeu/341u/3572)
  
또한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라는 명성에 조금이라도 부응할 수 있도록 지장암 내 기린선원을 정비하여 많은 대중이 살 수 있게끔 조건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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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정효·정선·정법·정탁·정봉·정오·정석·정명·정준·정국·정진·정욱·정일스님 등이 있다.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 pp. 459~463.
+
* 한국비구니연구소 ,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년, pp.606~61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31.
+
* 한국비구니연구소 ,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03)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
+
* 재경대구사범대구교육대학교동창회 다음카페(https://cafe.daum.net/tkeu/341u/3572)
* 월정사 지장암 감원 정안스님 입적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475
 
* 佛心도 반해버린 산 병풍과 계곡 물소리, 백암산 천진암 [자비화 카페],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시맨틱 데이터==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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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안스님(淨岸, 1951生, 비구니) | 정안(淨岸)스님]] || 본항목 ||  || 정안스님(淨岸, 1951~2014)|| 淨岸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안스님(淨岸,_1951生,_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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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경스님(泰鏡,1930生, 비구니)[ | 태경(泰鏡)스님]] || 본항목 ||  || 태경스님(泰鏡,1930~2006)|| 泰鏡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태경스님(泰鏡,_1930生,_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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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0일 (일) 22:18 판



정의

스님은 대구교도소 법사 활동 중 학력을 이유로 출입증 발급이 거부되어 만학의 공부를 시작해서, 마침내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활동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0 경북 달성 출생
1945 해인사 삼선암에서 [삼선암 [1]에서 성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5 [[해인사에서 경하(景霞)스님|경하스님] 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0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1 동화사 강원 사교과 수료
1956 순천 선암사 강원 대교과 졸업
1957 운문사에서 만우스님으로부터 전강받음
1957~1967 선암사, 화운사, 운문사 강사 역임
1960 대구교도소 3년간 교화 활동
1969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72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학위 취득
1972~1977 동학사 강원 강사
1974 대한불교 조계종 제4, 5대 중앙종회의원
1985 비구니계단 증사
1985~1995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사무총장
1986~1989 비구니 강사회 회장
1985~1995 제10대 중앙종회의원
1994~1999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15회, 특1회 갈마아사리, 12, 14, 16, 17회, 특2회 존증아사리)

1995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1998~2000 전계 대화상(大和尙)(특3회 니화상(尼和尙)), 법성사 주지
2006.3.18. 입적 (법납61세, 세납 77세)

기타사항

문중 계민( )
생활신조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상훈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도제교육 공로 표창
수계제자 정효·정선·정법·정탁·정봉·정오·정석·정명·정준·정국·정진·정욱·정일

활동 및 공헌

출가 및 수학

출가 및 수학 인철(印哲) 태경(泰鏡)스님은 1930년 5월 13일에 경북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 817번지에서 아버지 정유문과 어머니 김두리 사이의 7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낙안이며, 이름은 정상순이다.

스님의 가족은 모두 불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동생 2명과 함께 가족 중 5명이 승려가 되었다. 스님의 언니는 여섯 살에 출가하였고, 스님은 방학 때 고모가 계신 절에 다니다가 고모스님의 권유로 1945년 3월에 해인사 삼선암에서 성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해인사에서 경하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해인사 강원의 사집과를 수료하였으며, 1951년 동화사 강원의 사교과를 수료했다. 1956년 순천 선암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였고, 1957년 스님의 나이 28세에 청도 운문사에서 정만우 강백으로부터 전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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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재소자 포교 인연

태경스님이 서울 승가사에서 강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한전에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난 뒤, 젊은 남자가 탁자 위의 돈을 달라고 하면서 총을 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장면을 맨 처음 목격한 한 스님은 충격으로 3개월 만에 입적했고, 두 번째로 본 스님도 일 년 만에 입적했다. 태경스님은 세 번째의 목격자였는데 너무나 놀란 나머지 병을 얻어 더 이상 승가사에 머물지 못하고 대구의 고모스님 절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0년 대구교도소에서 하루는 70세의 고모스님과 함께 교도소 법회에 참관하게 되었는데, 당일 법문을 담당한 법사스님이 나오지 않았다. 스님은 갑작스럽게 법문을 부탁받았는데, 승가사 사건으로 심장이 놀란 스님은 뜻밖의 상황에 너무 떨려서 눈앞이 캄캄했다.

스님은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겨우 단상에 올랐다. 낯선 젊은 스님의 등장에 대중(수감자)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스님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정 시간 3분가량 ‘부처님 위신력이 있다면 지금 저에게 가피를 주십시오.' 하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짧은 시간의 입정이었지만 차분해지고 정신이 또렷해져서 자신감이 생겼다. 스님은 한 시간의 법문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자신 있고 당당하게 법문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날 이후 스님은 대구교도소에서 4년 동안 법사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은사와 상좌의 입적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만학의 수행자

스님이 교도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타종교의 성직자들은 행사 날이 아닌 평일에도 교도소에 언제라도 드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 있는데, 스님만 없었다. 스님이 교도소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스님은 최종학력이 국민학교 졸업이라 교양 부족으로 수감자들에게 말실수를 할까 염려되여 출입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스님은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스님은 1961년 나이 32세에 도반스님 9명과 같이 원화여중에 입학을 했으나 만학의 스님 신분이므로 교복착용과 머리를 기르겠다는 약속으로 입학을 허락했다. 그러나 재학 도중에 계속 삭발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고 몇몇 스님들은 중간에 포기해서 4명만이 졸업했다.

중학교 졸업 후 조선대학교 부속학교인 남자고등학교에 비구니스님 3명이 입학을 했다. 남학생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중 두 스님마저 자퇴해서 스님만 혼자 남아 1965년 1월 26일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 즈음에는 36세의 나이로 만학의 꿈을 이룬 스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크게 실릴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님은 동국대학교에 종비생 제도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2기 종비생으로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1969년 2월 28일에 졸업을 했다. 다시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종단의 발령을 받아 4년 동안 동학사 강사로서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스님은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싶었으나 건강도 좋지 않아서 결국 12년간의 학생 시절을 마쳤다. 동학사 강사 소임은 건강이 악화되어 1977년 3월 31일에 그만두게 되었다.

경력

1974년부터는 조계종 제4, 5, 10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며 부지런히 활동을 하였으며, 1985년에는 비구니계단의 증사를, 1985년부터 1995년까지는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비구니 강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서 1999년까지는 갈마위원으로 수계 산림을 주도했다.

1995년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와병 중에도 전계대화상으로서 잠시도 몸을 쉬지 않고 정진을 했다.

후학양성

행자교육원에 있을 때 스님은 ‘파거불행 노인불수(破車不行 老人不修)’라는 법담을 꼭 해주었다. 스님은 젊은 시절에 놀란 심장과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마음만큼 거동이 여의치는 못하지만 지금도 쉼 없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았던 스님은 건강 악화로 학업을 다시 시작하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겼다. 그래서 평생 자신의 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언제나 탁마해온 스님은 후학들이 꾸준히 정진해주기를 간절히 발원했다.

입적

인철당 태경스님은 2006년3월18일 오후7시 서울 법성사에서 법납 61세 세납 77세로 원적에 들었다.

당시 전국 비구니회장 명성 스님은 영결사를 통해, “여기 모인 사부대중은 평소 태경 스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며 후학을 양성하시고 정법계율을 강의하시던 그 형상을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해 슬픔에 잠겨 있다”며 “다시 사바세계에 나투시어 스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널리 펼치시길 바란다”고 슬퍼했다.

수계제자로는 정효·정선·정법·정탁·정봉·정오·정석·정명·정준·정국·정진·정욱·정일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606~61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03)
  • 재경대구사범대구교육대학교동창회 다음카페(https://cafe.daum.net/tkeu/341u/357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태경(泰鏡)스님]] 본항목 태경스님(泰鏡,1930~2006) 泰鏡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태경스님(泰鏡,_193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정안(淨岸)스님 봉래(蓬萊)문중 ~의 일원이다
정안(淨岸)스님 혜종(慧宗)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정안(淨岸)스님 오대산 남대 지장암 ~에서 출가하다
정안(淨岸)스님 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정안(淨岸)스님 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정안(淨岸)스님 오대산 남대 지장암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정안(淨岸)스님 백양사 천진암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정안(淨岸)스님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을 중창하다
정안(淨岸)스님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을 설립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