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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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인물정보
 
|표제 = 현행(賢行)스님
 
|표제 = 현행(賢行)스님
|사진 = 531현행(賢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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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File:현행스님.png|현행스님.png]]
 
|법명 = 현행(賢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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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 = 서기순(徐基順)
 
|속명 = 서기순(徐基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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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충남 부여 출생  
 
|1928 || 충남 부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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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http://xn--q20bm8bgy1a0fc8wd.kr/ 오대산 남대 지장암]에서 [[혜종(慧宗)스님|혜종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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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2164/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성(萬性)스님|만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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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만화_희찬스님|희찬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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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만공(滿空)스님|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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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청하당(淸霞堂)_성원(性源)_대선사|청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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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서울 청룡사에서 [[석암(昔岩)스님|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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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문사 강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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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내원사, 대원사, 해인사, 승가사 등 안거 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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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 ||석남사에서 수선 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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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견성암 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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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81 ||지장암 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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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견성암 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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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지장암 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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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견성암 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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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6 || [http://www.baekyangsa.com/intro.php 백양사]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천진암] 도감(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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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8, 9, 10, 11, 12, 13, 14회 존증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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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사회학과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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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견성암에서 입적(세수 75세, 법랍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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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6 || 지장암 감원 <ref> 감원(監院): 절을 감독하고 승려들의 모든 일을 맡아 보살피는 직책 </ref> 소임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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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정진선원에서 2년 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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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문경 윤필암 하안거 성만. 월정사 포교원 연꽃유치원 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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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12. ||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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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0%"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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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20px" | 문중|| 봉래(蓬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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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20px" | 문중|| 실상(實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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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탐(貪)·진(眞)·치(癡) 벗겨내니 원래 완벽하게 갖추어진 자성광명(自性光明) 절로 드러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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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신조||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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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전남 장성경찰서 감사장 수상(1989)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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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청정하게 참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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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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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
|-
 
|취미||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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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지훈(地熏)·지용(地湧)·지륜(地輪)·지광(地光)·지현(地賢)·해만(海曼)·지욱(地煜)·지우(地雨)·지중(地中)·지도(地導)·지경(地經)·지범(地凡)·지성(地成)
 
 
|}
 
|}
  
 
==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
===출가 결심===
은공(恩空) 정안(淨岸)스님은 1951년 강릉 연곡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진경희이다.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던 1970년, 스님도 콜레라에 걸려 심하게 앓던 중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내 갈 길이 따로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트여 이듬해인 1971년 2월 1일 오대산 지장암(강원 평창)에서 출가하였다.
+
현행(賢行)스님은 1928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서길봉과 어머니 박은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강이며, 이름은 서기순이다.
[[파일:431-01.jpg|섬네일]]
 
  
===수학과 불사===
+
어느 날 성철 큰스님의 법제자인 용음스님이 홍성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신 일이 있었다. 현행스님은 용음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상살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욕심을 갖지도 않고 출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렵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는 며칠간 고심한 끝에 출가를 허락했다.
출가 후 스님은 [http://www.unmunsa.or.kr/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http://xn--q20bm8bgy1a0fc8wd.kr/ 오대산 지장암]으로 돌아와 재무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라남도 장성 [http://www.baekyangsa.com/ 백양사]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천진암]에서 사찰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스님은 중국 유학과 천일지장기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의 많은 대중스님들이 발우를 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스님에게 누군가가 스님 자리라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법석을 여는 꿈을 꾸다니….’
+
===등불을 건네주신 용음스님===
  
스님은 꿈이 천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감하고 천진암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 천진암으로 내려가 불사에 혼신을 다하였다. 천진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당시에는 낡은 법당과 허물어져가는 요사채만으로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스님은 1945년 나이 18세에 쌀 두 말과 옷 서너 벌을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수덕사 아랫마을에 내려 정혜사로 올라가는데, 산이 얼마나 웅장한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무섭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스님은 용음스님을 만나서 스님이 되려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다.
 +
“스님이 돼? 스님이 되면 좋지. 그런데 날이 너무 어두워서 못 올라가겠다. 내가 등불 하나 준비 해줄 테니 저기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으로 가거라.”
 +
스님은 용음스님이 주신 등불을 가지고 당시 정혜사 바로 밑에 있던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에 도착하자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한 명 왔다는 소리에 명주 목도리를 두른 젊은 스님 9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
잠시 후 대중들은 만공 큰스님이 간월도 간월암에 가셨다가 돌아오신다며 마중을 나갔다. 흰 동정에 검은 장삼을 입고 홍 가사를 걸친 스님 4명이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나머지 100여 명의 대중스님들이 줄지어 뒤따라왔다. 그 모습 또한 신선이 하강하는 것만 같아서 환희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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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인사를 한 후 스님도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께서 “응, 왜 왔니?” 하고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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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생활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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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이렇게 공손히 여쭈어 올리니 만공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그럼 한번 해봐라.” 했다. 스님은 이후 만공 큰스님 밑에서 10여 년을 생활했다.
 +
※ 홍인스님이 육조혜능 스님 배의 노를 주어주겠다는 이야기(육조법보단경)
  
스님은 천일지장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보수하고 부족한 생활용수를 보충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이용했던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었으며, 천진암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후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를 보수하여 천진암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
깊은 밤에 홍인 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육조 혜능은 강가에 이르러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탔다. 홍인 대사가 배웅 나와 손수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려고 하자, 혜능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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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노는 제가 젓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앉아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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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내가 너를 건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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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제가 아는 바가 없을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셔야 하지만, 알고 난 지금은 제 힘으로 건너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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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그렇다. 앞으로 불법이 너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리라. 나는 삼 년이 지나면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너는 되도록 남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 불법을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또한 호남에 비구니 선원이 거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워 파도처럼 밀려오던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10월 15일 삼천일 지장기도 불사 회향을 하면서 호남에 첫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 백암선원(白岩禪院)을 개원하고 그 해 첫 동안거를 열었다.
+
===은사 만성스님과의 인연===
  
===은사와 상좌의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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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시기에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오대산 지장암 면모 일신===
+
===입적===
[[파일:431-03.jpg|섬네일|지장암의 모습]]
+
현행스님은 응민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다. 공부에 대해 늘 탁마를 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짧았는지 응민스님은 먼저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남아 있는 자신이 응민스님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80세 가까운 고령에도 세세생생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열심히 살면 신장님, 불보살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수행에 임했다.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와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처가 다 배움터요, 행하는 모든 일이 공부 아님이 없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이에 스님은 지장암으로 돌아왔고 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화두와 직면하게 되었다.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화두, 곧 육신을 죽일 것인가, 설자리를 버릴 것인가, 마음을 죽일 것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공동체 삶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에피스드를 수행의 재료로 삼아 어려움을 통해 겸손을, 가난한 살림살이를 통해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
현행스님은 2002년 견성암에서 수행의 열정을 후학에게 남기고 세수 75세, 법랍 58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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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
또한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라는 명성에 조금이라도 부응할 수 있도록 지장암 내 기린선원을 정비하여 많은 대중이 살 수 있게끔 조건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사찰==
 
==사찰==
* 보덕사(☎ 041-353-9306):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2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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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덕사 견성암(☎ 041-337-6007,  http://www.sudeoksa.com/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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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59~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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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617~6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31.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1.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
 
* 월정사 지장암 감원 정안스님 입적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475
 
* 佛心도 반해버린 산 병풍과 계곡 물소리, 백암산 천진암 [자비화 카페],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시맨틱 데이터==  
 
==시맨틱 데이터==  

2022년 7월 20일 (수) 22:25 판



정의

현행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출가하여 대중스님들과 잘 화합했으며, 특히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8 충남 부여 출생
1928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6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5 서울 청룡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5 내원사, 대원사, 해인사, 승가사 등 안거 성만
1977 견성암 입승
1989 견성암 도감
1989 견성암 선원장
1989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8, 9, 10, 11, 12, 13, 14회 존증아사리)
2002 견성암에서 입적(세수 75세, 법랍 58세)

기타사항

문중 실상(實相)
수행지침 청정하게 참선 수행
수계제자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

활동 및 공헌

출가 결심

현행(賢行)스님은 1928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서길봉과 어머니 박은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강이며, 이름은 서기순이다.

어느 날 성철 큰스님의 법제자인 용음스님이 홍성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신 일이 있었다. 현행스님은 용음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상살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욕심을 갖지도 않고 출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렵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는 며칠간 고심한 끝에 출가를 허락했다.

등불을 건네주신 용음스님

스님은 1945년 나이 18세에 쌀 두 말과 옷 서너 벌을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수덕사 아랫마을에 내려 정혜사로 올라가는데, 산이 얼마나 웅장한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무섭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스님은 용음스님을 만나서 스님이 되려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다. “스님이 돼? 스님이 되면 좋지. 그런데 날이 너무 어두워서 못 올라가겠다. 내가 등불 하나 준비 해줄 테니 저기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으로 가거라.” 스님은 용음스님이 주신 등불을 가지고 당시 정혜사 바로 밑에 있던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에 도착하자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한 명 왔다는 소리에 명주 목도리를 두른 젊은 스님 9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대중들은 만공 큰스님이 간월도 간월암에 가셨다가 돌아오신다며 마중을 나갔다. 흰 동정에 검은 장삼을 입고 홍 가사를 걸친 스님 4명이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나머지 100여 명의 대중스님들이 줄지어 뒤따라왔다. 그 모습 또한 신선이 하강하는 것만 같아서 환희심이 일었다. 대중이 인사를 한 후 스님도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께서 “응, 왜 왔니?” 하고 물으셨다. “승려 생활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이 이렇게 공손히 여쭈어 올리니 만공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그럼 한번 해봐라.” 했다. 스님은 이후 만공 큰스님 밑에서 10여 년을 생활했다. ※ 홍인스님이 육조혜능 스님 배의 노를 주어주겠다는 이야기(육조법보단경)

깊은 밤에 홍인 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육조 혜능은 강가에 이르러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탔다. 홍인 대사가 배웅 나와 손수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려고 하자, 혜능이 말하였다. “스님, 노는 제가 젓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앉아 계십시오.” “아니다. 내가 너를 건네주리라.” “아닙니다. 제가 아는 바가 없을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셔야 하지만, 알고 난 지금은 제 힘으로 건너는 것이 옳습니다." “참으로 그렇다. 앞으로 불법이 너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리라. 나는 삼 년이 지나면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너는 되도록 남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 불법을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은사 만성스님과의 인연

정화시기에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입적

현행스님은 응민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다. 공부에 대해 늘 탁마를 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짧았는지 응민스님은 먼저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남아 있는 자신이 응민스님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80세 가까운 고령에도 세세생생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열심히 살면 신장님, 불보살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수행에 임했다.

현행스님은 2002년 견성암에서 수행의 열정을 후학에게 남기고 세수 75세, 법랍 58세로 입적했다. 수계제자로는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

사찰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617~6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정안(淨岸)스님 본항목 정안스님(淨岸, 1951~2014) 淨岸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안스님(淨岸,_195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정안(淨岸)스님 봉래(蓬萊)문중 ~의 일원이다
정안(淨岸)스님 혜종(慧宗)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정안(淨岸)스님 오대산 남대 지장암 ~에서 출가하다
정안(淨岸)스님 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정안(淨岸)스님 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정안(淨岸)스님 오대산 남대 지장암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정안(淨岸)스님 백양사 천진암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정안(淨岸)스님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을 중창하다
정안(淨岸)스님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을 설립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