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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4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정의

상락(常樂)스님은 내 생명과 불교의 생명은 둘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참선 수행정진에 전념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8 대구 출생
1947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연진(蓮眞)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8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3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5 경주 분황사, 삼선암, 선암사, 김룡사에서 수학
1957 윤필암 수선 안거 성만
1958 범어사 대성암 수선 안거 성만
1960 대성암, 세등선원, 위봉사 입승[1] 역임
1998 위봉사 태조암에서 수행 정진
1999 자비원 주석
2004 해인사 자비원 주석
문중 계민(戒珉)문중
수계제자 법기(法基)·선경(禪鏡)·서림(瑞林)·서용(瑞龍)·서곡·서천·서초·서담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3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4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5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6
[자비원전경]사진출처:전국비구니회 해인사 자비원 https://kbhiksuni.org/haeinsa-jabiwon/

상공(常空) 상락(常樂)스님은 1928년 1월 28일 대구시 범물동 49번지에서 아버지 최종한과 어머니 추필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최성태이다. 스님은 19세가 될 때까지 불법은 물론 절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에 발심 출가하여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골 냇가에서 빨래를 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운문사에 가시는 비구니스님을 보는 순간 발심의 기운이 온몸 가득히 차오르면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님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에 스님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비구니스님께 여쭈었다.

너무나도 태연히 스님이 되겠다는 아이를 보고 스님은 절에 돌아가 다른 스님을 보내 줄 테니 오고 싶으면 그때 오라고 이르시고는 스님의 집을 묻고 가셨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 범행 노스님이 직접 스님을 데리러 집으로 찾아오셨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님을 따라 나서는데 직장에서 퇴근을 하시던 아버지가 스님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스님은 차마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 노스님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사흘이 지난 후에 깨어나셨지만 스님의 마음에 이미 차오른 발심은 지워지지 않아서 다시 찾아와주신 노스님을 따라 운문사로 가게 되었다. 그때가 1947년 8월이었다. 이렇게 스님은 운문사 청신암에서 연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12월에 삭발을 했다. 그리고 21세 되던 해인 1948년 3월 3일에 운문사 북대암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1949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겼고 26세에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수학 및 구도 정진

그 후 전쟁이 끝난 뒤 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보광사는 은영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 스님은 어려서부터 수행을 하면서 살아온 다른 스님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스님은 강원에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른 스님들은 스님의 나이가 많다고 만류하며 곧바로 선방으로 가기를 원하셨다.

자신의 뜻을 굽힐 수 없었던 스님은 28세 되던 해인 1955년, 어른들 몰래 경주 분황사로 경을 공부하러 갔다. 그런데 공부한 지 두 달 만에 강원이 해산되어 다시 보광사로 되돌아갔다가 대구에서 탁발을 하여 해인사로 가서 법화경을 공부했다. 그 후 전라도 선암사 강원에서도 두 달을 지냈지만 또 해산이 되어 김룡사로 갔다. 그곳 강원과 선방에서도 공부는 겨우 한두 달밖에 못하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스님은 ‘복을 못 지어 공부할 운이 없나보다.' 하며 단념을 하고 선방 생활을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한 생각 돌이켜보니 화두를 타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30세 때인 1957년 삼칠일 능엄기도를 하여 향곡 큰스님께 화두를 받고, 윤필암에서 응민스님 등과 수선안거를 성만했다. 그러나 선방에서 정진하는 것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자 금산에 가서 100일 기도를 한 후 전라도로 와서 전강 큰스님을 친견하고 공부를 점검받았다. 그 후 스님은 범어사 대성암 만성스님 밑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를 하고 지리 산 토굴로 들어가 5년간 피나는 수행정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석남사에서 한 철을 난 후 대성암에서 입승을 살고 세등 선원과 위봉사에서 소임을 살았다. 어려웠던 시기에 탁발을 하면서 선방을 다녔지만 정진한 만큼의 보람이 있었기에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담담히 구도의 열정을 벗 삼아 지금까지 살아왔다.

1998년 상락스님은 태조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조암은 철거 직전에 어느 비구스님이 산다고 하여 철거되지 않았다. 비구 스님은 다 무너진 기와를 들어내고 함석을 올린 후 몇 해 살다가 나갔고, 후임으로 온 비구니스님이 3년을 사는 동안 불사를 이룩했으며, 이후 비구니스님의 상좌스님 세 분이 죽기를 각오하고 정진을 했다. 그런데 잡다한 일이 너무 많아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위봉사 주지스님과 함께 해남 관음암에서 정진 중이던 상락스님을 모셔 온 것이다.

스님은 위봉사 태조암의 한가하고 적막한 기운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때까지 본사에 등록이 안 되어서 위봉사의 암자로 있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서 개인 이름으로 전기를 끌어다 썼다. 물 이 귀해서인지 등산코스가 없어 관광객 또한 찾지 않으니 한가하게 화두 정진으로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스님은 수행자라면 화두를 일념으로 타파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내 생명과 불교의 생명은 둘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존경하고, 부처님의 제자는 일념으로 수행 정진해야 된다.'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

후학에 대한 당부

스님은 포교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을 먼저 포교하려 하지 말고 나 자신부터 포교를 하라는 것이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이번 생의 고생으로 업장을 소멸시켜야 이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다음 생부터는 열반의 안락함을 얻을 것이니 이 생에 꼭 참선을 해야 한다.”고 간절히 당부했다.

또한 금생에 성불을 못해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어느 생에서는 반드시 성불할 것이라 믿고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2004년 해인사 자비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인 상락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기(法基)·선경(禪慶)·서림(瑞林)·서용(瑞龍)·서곡·서천·서초·서담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2~66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상락(常樂)스님 본항목 상락스님(常樂, 1928~) 常樂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락스님(常樂,_192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상락스님(常樂) 계민문중(戒珉) ~의 일원이다
상락스님(常樂) 연진스님(蓮眞) ~의 수계제자이다
상락스님(常樂) 운문사 청신암 ~에서 출가하다
상락스님(常樂)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상락스님(常樂) 해인사 자비원 ~에서 주석하다
상락스님(常樂) 안거 ~을(를) 성만하다 문경 대승사 윤필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대전 세등선원(탄방동), 완주 위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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