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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일) 12:53 판
일홍(一弘)스님 | |
---|---|
법명 | 일홍(一弘) |
법호 | |
속명 | 황이순(黃李順) |
출생 | 1939.10.26. |
출가 | 1951년 |
입적 | |
사찰 | 동화사 양진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일홍(一弘)스님은 수행정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중생활의 모범을 보이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39 | 경북 상주 출생 |
1951 | 보은 법주사 수정암에서 성연(性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1 | 보은 법주사에서 월산(月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1 | 순천 선암사에서 수학 |
1963 | 울주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4 | 대구 동화사 양진암 원주 |
1977 | 은사스님을 도와 선방 증축 |
1978 | 법당(설법전) 신축 |
1986 | 사리탑 봉안 |
2004 | 현재 대구 동화사 양진암 주석 |
문중 | 수정(水晶)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정오(正悟)·정준(正準)·정관(正觀)·정묵(正默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봉정(奉政, 5)→유성(宥成, 6)→쾌유(快愈, 7)→성연(性蓮, 8)→일홍(一弘, 9)→정오(正悟, 10), 정준(正準, 10) |
활동 및 공헌
출가
일홍(一弘)스님은 1939년 10월 26일 경북 상주에서 아버지 황재묵과 어머니 성현순 사이의 5남 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이며, 이름은 황이순이다. 스님의 어머니는 유난히 몸이 약한 딸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소리를 듣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해주셨다. 일홍스님은 1951년 수정암에서 성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법주사에서 월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어려운 절 살림 고된 행자생활
은사스님보다는 노스님이신 쾌유스님 밑에서 성장한 일홍스님은 잠시 순천 선암사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수정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행자 생활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연약한 몸으로 개울에서 물을 긷는 일은 더욱 고되고 힘이 들었다. 그래서 씻을 거리를 모두 들고 개울에 나가서 다 씻어놓았다. 지금은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만 옛날에는 개울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당시에는 절 살림이 어려워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의 공양을 지어주었다. 법주사의 방이 꽉 차면 나머지 학생들을 수정암으로 보내주었는데, 얼마간의 밥값이나마 사중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들의 공양을 해주는 것은 나이 열두세 살의 어린 스님에게는 매우 고달픈 일이었다. 일홍스님은 1963년 울주 석남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고된 수행정진
'이 세상에 나와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겸손해하는 스님은 평생을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대중을 외호했다. 보은 법주사 수정암과 대구 동화사 양진암에서 평생을 한 결 같이 대중의 어머니 같은 손길로 묵묵히 살아온 일홍스님은 은사스님의 서릿발 같은 준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때로는 염불을 못한다고 꾸중을 들었고, 한차례 매를 맞은 적도 있다. 일생을 상기병으로 고생한 스님은 20년 동안 혼자서 35명 정도가 먹고 살 분량의 장을 봐왔는데, 들고 걷기도 힘들 만큼 무거운 짐을 진 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어 다니며 대중스님을 외호했다. 내원암 선원에서 장좌 정진할 때의 일이다. 해암 큰스님 밑에서 비구니 3명과 개심사 성견스님, 일홍스님, 보살 2명이 함께 정진했다. 그때 잠은 양진암에서 자고 새벽에 어두운 길을 내려가야 했다. 정진이 어느 정도 절정에 다다를 무렵 비구니스님 한 분이 “좀 누워도 될까요? 예? 좀 누워도 될까요?" 하며 혼자 잠꼬대를 했다. 이 모습을 본 스님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는데, 한 보살은 아예 벌러덩 뒤로 넘어져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큰스님께서도 잠을 못 이기고 자리에 누우셨다. 그때 잠이 들었던 보살은 후에 출가를 했다. 일홍스님은 '한 철 장좌정진하고 나니 눕고 싶은 생각이 떨어졌다.'고 한다. 공부하는 가운데 가장 큰 장애를 수면(睡眠)이라고 하는데, 눕고 싶은 생각마저 떨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쏟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양진암은 눈이 오면 마당보다 길을 먼저 쓸었다. 길이 한번 막히면 도무지 길을 내기가 어려워서 눈만 오면 모든 일을 제치고 눈 쓰는 일에 나서야 했다. 눈이 내리면 반가움보다는 겁부터 나던 시절이었다.
“어찌 신심이 지겨울 수 있는가?”
1977년 스님은 은사스님을 도와 선방 증축을 했으며, 1978년에는 법당(설법전)을 신축하고 1986년에는 사리탑을 봉안했다. 스님은 평생 은사스님께 한번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직 은사스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스님은 잠이 없고 부지런해서 2시간씩 기도를 했는데, 젊은 사람도 따라하지 못할 신심이었다. 때로 젊은 스님들이 “일찍 스님이 되셔서 신심이 지겹지도 않습니까?”하고 외람된 말씀이라도 여쭈면 “어찌 신심이 지겨울 수 있는가?”라고 가르치셨다.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일홍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정오(正悟)·정준(正準)·정관(正觀)·정묵(正默)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70~17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일홍(一弘)스님 | 본항목 | 일홍(一弘)스님 1939.12.26 ~ ) | 일홍 (一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홍스님(一弘,_193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일홍스님(一弘) | 수정문중(水晶) | ~의 일원이다 | |
일홍스님(一弘) | 성연스님(性蓮) | ~의 수계제자이다 | |
일홍스님(一弘) | 법주사 수정암 | ~에서 출가하다 | |
일홍스님(一弘) | 월산스님(月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일홍스님(一弘)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일홍스님(一弘) | 동화사 양진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원주 |
일홍스님(一弘) | 동화사 양진암 | ~을(를) 중창하다 | 설법전, 사리탑 |
일홍스님(一弘) | 동화사 양진암 | ~에서 주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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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동화사 양진암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1
주석
다른 비구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