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호스님(光毫, 1915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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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30.광호스님2.jpg|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15]] | + | [[File:30.광호스님2.jpg|섬네일|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15]] |
동오(東悟) 광호(光毫)스님은 1915년(을묘년)에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서지동에서 아버지 서안익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며, 이름은 안복순이다. | 동오(東悟) 광호(光毫)스님은 1915년(을묘년)에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서지동에서 아버지 서안익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며, 이름은 안복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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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30.광호스님4보덕사경내.jpg|[보덕사 경내]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16]] | + | [[File:30.광호스님4보덕사경내.jpg|섬네일|[보덕사 경내]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16]] |
보덕사는 1970년대 작은 암자로 시작했다. 청풍납자이자 비구니 금강계단의 초대 존증아사리 광호스님 과 제자 법인스님이 터를 잡으면서 도량의 면모를 갖추었다. | 보덕사는 1970년대 작은 암자로 시작했다. 청풍납자이자 비구니 금강계단의 초대 존증아사리 광호스님 과 제자 법인스님이 터를 잡으면서 도량의 면모를 갖추었다. | ||
2022년 6월 30일 (목) 05:51 판
광호(光毫)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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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40px]] | |
법명 | 광호(光毫) |
법호 | 동오(東悟) |
속명 | 안복순(安福順) |
출생 | 1915년 (비구니) |
출가 | 1924년 |
입적 | 1989년 |
사찰 | 보덕사 (부산 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697)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광호스님은 일생 동안 고고한 수행자의 진면목을 잃지 않고 청풍납자의 삶을 살았고 선암사 주지와 조계종 전국 비구니 금강계단 2・3회 존증(尊證) 아사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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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경북 청도 출생 |
1924 | 운문사 청신암에서 혜원(慧圓)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1 | 혜원(慧圓)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35 | 통도사에서 해담(海曇)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37~1944 | 통도사 강원 졸업 |
1944~1956 | 천성산 내원사, 수덕사 견성암, 범어사 대성암,삼각산 승가사, 송광사 감로암 등에서 수선 안거 |
1956 | 선암사, 계룡산 동학사 등 불교강원 주지 및 원장 |
1981 | 미국 전역 순회 포교 |
1983 | 조계종 전국 비구니 금강계단 2・3회 존증(尊證) 아사리 |
1985 | 조계종 전국 비구니회 고문 |
1989 | 보덕사에서 입적(세수 74세, 법납 65세) |
인적사항
문중 | 두옥(斗玉)문중 |
수행지침 | 낙락장송 그 아래에 참선하는 저 스님아! 앉은 제는 몇 해 인고 선 제는 몇 해인가! 앉거나 서거나 내 알 바가 아니로다. 천지개벽 그 이전에 한 모양은 무엇인가? |
수계제자 | 법인(法印)・법희(法喜)・법능・법영・능인・법공・진우・법열・보은・묘현・보관・법운 |
활동 및 공헌
출가
동오(東悟) 광호(光毫)스님은 1915년(을묘년)에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서지동에서 아버지 서안익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며, 이름은 안복순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님은 비린내와 누린내를 싫어하였고 오신채가 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메뚜기나 미꾸라지 등을 잡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기겁을 하고 말렸다.
그렇듯 천성적으로 남다른 성품을 가졌던 스님은 열 살이 되던 1924년, 어머니를 따라 호거산 운문사 청신암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 여기서 한 행자승의 삭발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머리를 깎고 여기서 살겠다.’며 어머니를 졸랐고 이를 계기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숙세의 선근과 불종자의 인연은 크고 깊었기에 대중을 외호하고 은사스님을 시봉하는데 한 치의 차질이 없었으며, 또한 독경과 송주에 부지런하고, 불전에 신앙심이 두터우니 어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31년 스님의 나이 17세 때에 혜원 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35년 21세에 통도사 서해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교육
유년에 출가하여 청년기를 맞이하면서 신심은 더욱 견고하고 일거일동의 행은 조금도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여 털끝만한 어긋남이 없고 웃을 때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은사스님과 종단의 큰 스님들로부터 인품을 인정받은 스님은 23세 때 불찰대본산 통도사 윤고경 대강백 문하에 들어가 7년간에 걸쳐 경론(經論)공부를 하게 된다. 1944년 30세에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본사인 운문사로 돌아왔다.
이때 사중에서 이력종장(履歷宗匠) 대비구니 법사가 났다고 하였으나 스님은 “진리는 마음을 깨닫는데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道在心悟不在言語)”라고 랬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이 중생 병을 고치는 약방문일 뿐, 바로 병을 낫게 하는 약은 아니라며 참선행각의 길을 떠났다.
수행
스님의 청풍납자의 삶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게송에 잘 드러나 있는데, 소유 집착을 놓고 발심수행에만 전념했던 스님의 정신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더욱이 꿈 속 인생. 꿈속에 꿈인 것을 욕심도 적게 하고 성을 내지 마십시다. 허허 한번 웃고 나서 한마음 돌이키면 모두가 공(空)인 것을 집착(執着)할게 무엇이며 걸릴 것이 무엇이랴. 생사가 사대(事大)하고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하니 어서 어서 발심(發心)하여 마음공부 하십시다. 보불은덕(報佛恩德)하십시다.
광호스님은 금강산에 들어가 만공선사를 친견하고 오대산의 방한암 선사를 참례한 후 명산대찰을 두루 찾아 선지식을 뵙고 정진에 채찍을 가하였다. 그리고 천성산 내원사, 수덕사 견성암, 범어사 대성암, 승가사, 송광사 감로암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 정진을 하였다.
선암사, 동학사 주지 역임, 존증아사리로 추대됨
1956년 42세 때에 전국비구니계의 추천으로 조계산 선암사, 계룡산 동학사 등에서 승가교육에 열의를 보이시는 등 도제 양성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1981년 67세 때에는 미국에 사는 교포신도들의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두루 순회하며 포교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3년 68세에 전국 종단의 금강계단에 이부승수계(二部僧受戒) 본법니계(本法尼戒) 존증아사리(尊證阿闍梨)로 추대되었다. 광호스님의 덕망은 더욱더 높아져 스님의 이름을 듣는 이나 스님의 법안을 뵙는 이가 모두 다 환희심을 느꼈다.
입적
스님의 많은 제자들 중에 법인스님과 법희스님이 각별한 효심으로 은사스님을 시봉하여 부산 보덕사와 광주 흥룡사에 편안히 모시니 사람들은 복 많고 덕 많은 노스님이라 불렀다.
광호스님은 1989년 74세인 1월 8일 ‘천하제방총림(天下諸方叢林)에서 ‘납팔월용맹정진(臘月八勇猛精進)하는 날이니 우리도 공부하자.’하며 점심공양 한 후 차 한 잔을 나누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낙락장송 그 아래에 참선하는 저 스님아 앉은 제는 몇 해이며 선 제는 몇 해런가? 앉거나 서거나 내 알 바가 아니로되 천지개벽 그 이전에 한 모양은 무엇인가!
그리고 함박웃음을 지으시더니 오후 3시가 되어‘ 속이 조금 불편하다.’며 자리에 누웠고 5시가 되자 홀연히 입적하였다. 이 때 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 66세였다.
오늘날 지계제일의 율사로 이름난 일타(日陀) 큰스님은 광호스님의 입적 후 영결식에 즈음하여 스님의 행장을 정리하는 게송을 지었다.
금강산 제일봉에 높고 높은 고암상에 송락 쓰고 홀로 앉은 청풍 납자 되고 싶네. 사바세계 모든 일이 무엇이 견고한가? 이 몸도 내 아니니 참 나는 누구인가?
일생 동안 고고한 수행자의 진면목을 잃지 않았던 대비구니 광호스님의 육신은 비록 사바의 연(緣)을 접었으나, 그 얼은 오늘도 면면히 빛을 발하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법인(法印)・법희(法喜)・법능・법영・능인・법공・진우・법열・보은・묘현・보관・법운스님 등의 상좌들이 비구니의 본분을 뿌리내리며 위상을 지켜가고 있다. ※ 불일회보 발취(1989. 2. 1 제98호) (일타 큰스님께서 써주신 주요 행장 정리)
부산 보덕사
보덕사는 1970년대 작은 암자로 시작했다. 청풍납자이자 비구니 금강계단의 초대 존증아사리 광호스님 과 제자 법인스님이 터를 잡으면서 도량의 면모를 갖추었다.
작은 법당과 요사채 한 채가 전부였다. 여기에 무상선원을 개설하고 비구니 선원과 강원을 시작했다. 도 심이 발전하면서 산 아래에 있던 민가가 점점 올라왔다. 도량주변이 번잡해지고 더 이상 선원과 강원에 서 정진하기가 어렵게 됐다. 광호스님이 청암사에 비구니 강원을 개설해 보덕사 강원을 옮겼다. 청암사 비구니승가대학의 시원이 바로 보덕사 강원인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보덕사는 도심사찰로 대중을 교화하는 도량이 되었다.
- 출처: 승보사찰 송광사(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onggwang01/221385617550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60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155~165.
- 법보신문, 19. 광호 스님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10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어제와 오늘 <中> 인물과 역사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91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
- 현대불교, 수행·전법·실천 분야서 큰 발자취, 한국불교 발전 원동력 ‘자리매김’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Print.html?idxno=285221
- 중기이코노미, 열반에 든 겨울 ‘나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https://www.junggi.co.kr/article/articleView.html?no=1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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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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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光毫)스님 | 본항목 | 광호스님(光毫, 1915~1989) | 光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광호스님(光毫,_1915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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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光毫)스님 | 운문사 청신암 | ~에서 출가하다 |
광호(光毫)스님 | 혜원(慧圓)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광호(光毫)스님 | 해담(海曇)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광호(光毫)스님 | 선암사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
광호(光毫)스님 | 동학사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
광호(光毫)스님 | 보덕사 | ~을 창건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