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보문사의 역사

천년고찰 탑골승방 보문사(普門寺)는 서울시 성북구 보문사길 20에 위치한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예종 10년인 1115년에 담진(曇眞)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이래 많은 고승대덕들의 수행처와 신도들의 기도처로 불성(佛性)을 함양하는 도량으로 거듭났으며, 창건을 전후 사찰 내에 여러 기의 탑을 조성하여 보문사와 주변을 ‘탑골’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으로, 한양도성 4대문 안팎의 사찰들을 폐사시키거나 정업원(淨業院)으로 사용하였다. 보문사는 다행히 흥인지문(興仁之門) 밖에 위치해 있어 폐사의 화(禍)를 면하고, 정업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보문사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가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그리워하면서 보문사 뒤쪽에 있는 낙산 동망봉에 오르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는 보문사를 통해서 동망봉에 올라 정순왕후를 위로 한 후에 보문사에서 다과를 함께 했다고 한다. 현재 보문사에 모셔져 있는 『법화경』(보물 제1164-2호, 묘법연화경 권3~4, 5~7, 2책)은 정희왕후가 성종대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판각한 것을 모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유추해 보면, 당시에 보문사와 보문사의 동망봉을 중심으로 정순왕후와 정희왕후의 인간적인 연민과 복잡한 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숙종 18년인 1692년에 묘첨(妙僉) 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영조 23년인 1747년에도 중수를 했다는 내용이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보문사의 대웅전은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건축물이라 한다. 이후 순조 26년인 1826년에 수봉 법총 스님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만세루(萬歲樓)를 건립하였고, 1865년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대원군 등 왕실 일가의 후원으로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대웅전을 중수할 때에 참여한 목수들이 낮에는 창덕궁 복원공사에 참여하였다가 저녁 무렵에는 대웅전 중수공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867년(고종 4)에는 묘승전에 지장탱화를 봉안한 이래로 많은 불사를 진행하여 현재의 사격을 형성하고 있다.

보문사는 정순왕후와 정희왕후의 인연 외에도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어 왔으며, 왕실로부터 전해진 유물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을 장식하였던 연수식(輦垂飾)과 각종 매듭, 인로왕보살번, 대원군으로부터 받은 금동보살상, 순정효황후(順貞孝皇后)로부터 받은 명나라 연호가 들어가 있는 상아 관세음보살상, 각종 생활용품과 이방자 여사의 칠보반지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보문사와 갑신정변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일본에 망명해 있는 동안 정변의 주역으로서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갑신일록(甲申日錄)』에 보면 “1884년(甲申) 11월 26일(음력 10월 9일)에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이규완·유혁로·윤경순·이인종 등이 탑골승방 보문사의 조씨 성을 가진 비구니 스님 방에서 3일간 머물면서 갑신정변의 거사계획을 수립하였다.”고 하였다. 이들 개화파들은 보문사에서 회합을 하면서 갑신정변의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정하고, 11월 28일에 거사 일을 12월 4일로 정했다. 거사를 일으킨 날은 우정총국의 낙성식이 있던 날로, 처음에는 거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당시 정권의 실세로 있으면서 여러 주요 관직들을 독점하던 명성황후의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는 처형하기도 하였지만, 3일 만에 진압되어 이른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훗날 춘원 이광수가 인터뷰한 박영효의 회고담에서도 보문사에서의 거사계획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으며, 춘사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개화당이문”도 보문사와 갑신정변에 대해서 일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탑골승방 보문사가 개화파 인사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보면 당시 보문사 스님들이 개화파들의 이념에 동조했거나 지지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보문종의 전각과 성보문화재

현재 보문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극락전, 심우당, 묘승전, 시왕전, 보광전, 산신각, 삼성각, 석굴암, 노전, 만불전, 종각 등 전각 13개동을 비롯하여 요사채 5개동 등을 소유하고 있다. 2023년 현재, 연건평 1,500평 규모의 보문종문화체험관 건립불사를 진행 중이다.

보문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2017년 수리를 하면서 발견된 ‘상량문’과 ‘상량복장물’을 분석해보면, 서울시에서 현존하는 사찰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보문사를 대표하는 석굴암은 1972년에 착공하여 3년 6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처 점안식을 하였다. 경주 석굴암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으나, 구성면에서 볼 때 경주 석굴암은 정면이 1문인데 비하여 보문사 석굴암은 3문이며, 실내 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실내 천장으로 공기가 유통되게 하였다. 본존불은 석굴암 부처님의 80% 크기로 조금 줄여서 만들었고, 석굴암의 전실에 있는 팔부신중상은 보문사의 석굴암에서는 생략을 하고 있다.

보문사에는 “보물 제1164-2호(『묘법연화경』권3〜4, 5〜7)”,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8호(극락보전 영산회상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9호(극락보전 신중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보문사 지장보살도)”를 비롯하여, 선불장・호지문・법보전・종각을 해체하면서 나온 각종 유물과, 석조로 조성된 석굴암의 부처님과 신장들을 조성하기 위해 사전에 제작한 석고 모형들은, 한국불교 미술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문사에만 유일하게 존재한다.

보문종의 창종과 비구니강원

대한불교보문종은 해방 이후 비구측(조계종)과 대처측(태고종)의 분쟁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부처님의 정법을 지키고, 비구니스님들의 수행환경을 유지·보존하며 삼보정재의 유실을 막고,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1971년에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2년에 대한불교보문종을 창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에는 한때 수행하는 스님들이 가장 많을 때는 200여명이 거주하였으며, 보문사만의 특수 형태인 별당(산내 암자격)이 많을 때는 9개가 있었다. 사회적인 변화와 수행환경의 변화로 세속에서 분가를 하듯이 많은 스님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사찰(포교당)을 만들어 전법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보문사 내에는 40여명의 스님과 다섯 개의 별당인 중실·서별당·청화당·남별당·동별당이 원융과 화합의 살림을 살면서 도심 포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보문사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비구니전문강원을 개설하여 운영해 왔는데, 1945년 이전에는 국일암과 남장사를 비롯한 몇 곳에서 비구니를 위한 교육이 있었지만 이곳 보문사의 강원만이 유일한 비구니전문강원으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보문사 비구니전문강원에는 비구니 3대 강백으로 불리는 월광금룡, 일명금강, 화산수옥 스님 등이 강사로 있으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던 권상로 박사, 안진호 스님, 김대은 스님, 이종욱 스님, 안덕암 스님, 김동화 박사, 이종익 박사, 홍영진 강사, 황영진 강사, 이섭 강사 등이 많은 학인들을 배출하였다. 3회 졸업식에는 학인 스님들이 50여명이 넘을 정도로 전국에서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강원을 중심으로 한 교학(敎學)뿐만 아니라, 전통 불교문화와 음악인 범패의 연구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보문사의 범패는 지암 종욱 스님과 진호 석연스님, 그리고 박송암 스님으로 부터 전수를 받았다. 범패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겸한 보문사 스님들은 보문종의 어장인 선하스님을 중심으로, 수륙재와 예수재를 체계적으로 옛 것을 유지·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또한 각종 작법과 전통문화는 다른 종단이나 사찰에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송은영 스님의 불사와 보문사의 중창

‘송은영 스님’ 하면 ‘대한불교보문종’을, ‘보문종’ 하면 ‘송은영 스님’을 떠올릴 만큼 송은영 스님은 보문종과 보문사의 중창불사를 위해 일평생을 헌신하신 스님이다. 은영스님은 선방의 수좌였던 은사 긍탄스님을 대신하여 어린 시절부터 보문사의 살림과 불사를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은영스님은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모든 일과를 수행과 불사에 전념하면서 도량불사, 도제양성, 자비사상의 실천(복지실현)이라는 세 가지 서원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분초를 다투는 치열한 삶을 사셨다.

첫째 도량불사를 살펴보면, 보문사의 중창과 사격의 일신을 위해 요사채 신축, 대웅전 중수, 선불장 신축, 삼성각 신축, 범종각 신축과 대종을 주조하였다. 또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의 신축을 비롯하여 석굴암과 묘보탑을 조성하여 수행과 불교문화가 살아 움직이는 보문사를 만들었다.

둘째 도제양성 불사를 살펴보면, 당대 최고의 강백들을 모셔다 비구니전문강원을 개설하셨고, 불교문화의 전승과 보존에 관심을 가지시고 강원학인들과 대중스님들이 범패의식을 배우도록 권장하시면서, 본인 스스로도 범패를 공부하셨다. 또한 스님은 비구니 스님들의 권익과 수행환경을 위해 ‘우담바라회(현 전국비구니회의 전신)’ 창립에 물심양면으로 기틀을 마련하시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불자의 양성을 위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보문사에서 거두어 키우셨는데, 많을 때는 60여명의 아이들을 키워서 불교와 국가에 필요한 인재로 양성하셨다.

셋째 자비사상(복지사상)을 살펴보면, 노인복지 시설인 ‘시자원’을 건립하여 거동이 불편한 스님들과 노인들이 머물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지었으며, 앞서 거론한 어려운 아이들을 거두어 탑골보육원이라 불릴 정도로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실천하는 데에 앞장 서셨다.

이 외에도 스님은 사찰의 재정적인 자립과 확충을 위해 이미 50∼60년대에 사찰 내에 한의원과 목욕탕·이발관·결혼식장을 비롯하여 보문신협을 운영하였으며, 미래불자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군 장병 포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또한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기 위해 무료급식소를 운영하였으며, 사찰음식을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하여 사찰이 재정을 확충하여 많은 불사를 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셨다. 이처럼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셨던 분이 바로 송은영 스님이셨다.

※ 보문사 : http://www.bomunsa.or.kr/

  • 내용출처: 2023.4.23. 보문사 제공
  • 동망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이후 단종과 자형인 정종(71461)이 유배당하자 단종비 정순왕후 는 시누이 되는 경혜공주와 함께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곳이 서울 승인의 청룡사다. 동망산은 정순왕후가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복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하는 낙산의 돌산 봉우리이며 청룡사 위쪽에 있다.

관련 스님

긍탄스님(亘坦), 은영스님(恩榮), 명오스님(明悟), 일조스님(日照), 혜안스님(慧眼), 법준스님(法俊), 묘관스님

사진자료

  • 선불장(選佛場): 1958년 조성된 선불장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상하2층 205평의 현대식 건물이다.

선불장이란 장래의 부처가 될 수행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으로써 “부처를 선발하는 자리“란 뜻으로 주로 강당이나 요사로 사용된다. 보문사 선불장은 건축당시에는 아래층에는 ‘보문강원(普門講院)’을 윗층에는 수선안거를 위한 ‘선방(禪房)’으로 사용하였다. 건축당시 보문사 대중은 200여명에 달했는데 이 곳 선불장에서 아침, 저녁 발우공양을 했으며 조석예불 후에는 전 대중이 참선 정진을 했던 이름 그대로 선불장이었다. 특히, 절 안의 대소사(大小事)나 대중공사 등을 행했던 큰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금의 선불장은 1층은 종단 유지법인인 재단법인 사무국과 보문종 총무원, 보문사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2층 법당은 대중 법회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신중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여 인등 을 밝히고 있다. 2022년 선불장 중창을 위해 허물었다. (내용출처: 보문사 홈페이지 http://www.bomunsa.or.kr/bbs/content.php?co_id=203020&tab=5)

역사적인 사진자료

은영스님의 옛 사진들

법준스님(法俊)과 선하스님(법준스님 상좌) 사진

묘관스님(妙觀, 1932~2023)보살계첩, 비구니호계첩(比丘尼護戒牒)등

보문종의 일원이며 보문사 주지 역임, 기타 자세한 사항은 다음에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업로드 예정

1980년대 보문사 리플릿

보문사는 1972년 석굴암을 완성한 후 1980년대 순례객들을 위한 리플릿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특히 리플릿에는 영어를 병기하여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했다. 이 사진들을 통해 1980년대 보문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시자원은 보문사 경내에 있던 최초의 비구니 목욕탕과 양로원이 있던 건물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와 동망동터널 공사 때문에 허물었다.
  • 호지문과 선불장은 2022년 중창을 위해 허물고 재공사 중이며 2023년 말에 완공 예정이다.

참고 자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