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설(朴長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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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29년(영조 5)~1802년(순조 2) = 74세]. 조선 후기 영조~순조 때 활동한 문신. 참판(參判)을 지냈다. 자는 치교(稚敎)이고, 호는 분서(汾西)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통진(通津)이다. 아버지는 박도현(朴道顯)이며,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는 유해(柳楷)의 딸이다.

영조~순조 시대 활동

1774년(영조 50) 11월 46세 때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81년(정조 5) 9월 낭청(郎廳)으로 있을 때 찬집청(纂輯廳)에서 열조(列朝)의 보감(寶鑑)을 나누어 찬집하였는데, 당상 김익(金熤)과 효종조(孝宗朝)의 보감을 찬집하였다. 1785년(정조 9) 5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1786년(정조 10) 1월 사헌부 장령으로서 상소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안을 개진하면서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다스리는 근본을 세울 것과 어진 정승에게 정사를 맡겨 정치의 효과를 책임지울 것과 조상을 본받아 다스리는 규범을 정할 것과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과 징계와 토벌을 엄히 하여 세상의 변란을 안정시킬 것과 직책을 오래 맡겨 실적을 고과할 것과 학교를 돈독히 하여 선비의 습관을 바르게 할 것과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훌륭한 이가 나올 수 있는 길을 넓힐 것을 청하니, 받아들여졌다. 1788년(정조 12)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1789년(정조 13)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가 되었다. 1795년(정조 19) 7월 행 부사직(行副司直)으로 있을 때, 죄를 얻어 조적(朝籍)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1797년(정조 21) 2월 노모가 있으므로 사면되었다. 1799년(정조 23) 4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그 뒤 행 부호군(行副護軍)으로 있을 때인 1801년(순조 1) 2월 그가 한 소장(疏章)으로서 ‘맨 먼저 사학(邪學)을 공박하여 도를 호위한 공적’을 인정받아 참판(參判)에 승진되었다. 이 때의 사학은 천주교(天主敎)를 말한다.

성품과 일화

박장설의 성품에 대하여는 『정조실록(正祖實錄)』에 “그는 천성적으로 음험한 데다 행동마저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일찍이 순흥(順興)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가혹하게 학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정조실록』정조 19년 8월 5일]

후손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직(韓溭)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았다. 1남은 박효신(朴孝臣)이고, 1녀는 유지흡(柳之翕)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